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17717     2020-02-21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1길 106-1

월남사는 고려 중기에 진각국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창건 이후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진각국사의 성은 최씨이고 이름은 혜심(慧諶)으로 2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출가를 하게 되었다. 출가 후 보조선사 밑에서 수도를 하였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고종 21년(1234)에 57세로 입적하였다. 월남사 터에 서 있는 이 비는 절을 창건한 진각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린 형태이다. 받침돌인 거북은 입에 구슬을 문 상태로 긴 목을 빼어들고 네 발을 단단히 짚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매우 강렬하고 사실적이다. 발톱에서 보이는 현실성이나 목과 머리조각의 세부표현 또한 전체적인 균형과 잘 어우러져 한층 돋보인다. 비몸은 원래 매우 컸다고 하나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아랫부분만 남아 있으며, 표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이규보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며,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고종 때로 추정된다.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19323     2020-02-21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1길 100

월남사터에 남아있는 삼층석탑으로,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바닥돌 위에 기둥 모양의 돌을 세우고 그 사이를 판돌로 채운 뒤 넓적한 맨윗돌을 얹어 조성하였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매우 높으며,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였으며, 밑의 받침은 3단을 두었다. 지붕돌의 윗면은 전탑에서와 같이 계단식 층단을 이루었고,추녀는 넓게 수평의 직선을 그리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탑신의 모든 층을 같은 수법으로 조성하였고 위로 오를수록 낮은 체감률을 보인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받침 위에 꾸밈을 위해 얹은 석재 하나가 남아 있다.이 탑은 백제의 옛 땅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백제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기단 및 탑신의 각 층을 별도의 돌로 조성한 것이나 1층의 지붕돌이 목탑에서처럼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는 양식 등이 그러한 특징이 된다.대표적인 백제탑이라 할 수 있는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비교해볼 수 있으며, 전라도 지역에서는 규모나 양식으로 매우 중요한 석탑이라 할 수 있다.

영춘향교

영춘향교

2570     2020-02-21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영부로 2884-3

1399년(정종 1)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4년(광해군 6) 남천리로 이건하였으며, 화재로 소실되어 1659년(효종 10) 눌대(訥臺)로 이건하였다. 그 뒤 수해로 폐허화되어 1791년(정조 15)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811년·1870년·1891년 중수하고, 1977년 전면 보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경장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이 향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남희정

남희정

17585     2020-02-21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 향약의 시행처로 사용되었던 정자, 남희정 *

남희정은 1857년(철종 8) 당시 부사 황종림(府使 黃鐘林)이 지은 정자로 북(北)은 관어대(觀魚臺), 남(南)은 남희정(南喜亭)이라 하였다. 두 정자를 지은 목적은 양로(養老)와 교육(敎育)이였으며, 두 정자를 노인들에게 사용하게 하여 강학(講學)과 향약(鄕約)의 시행처로 사용하게끔 하였다. 이처럼 향약의 시행처로 정자가 사용됨은 매우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 남희정의 구조 *

정자의 구조를 살펴보면 사방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자의 내부에는 기, 명공기, 계헌 등이 걸려 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의 가구 구조는 모임지붕처럼 중앙을 향하여 서까래와 추녀가 모이고 이 부분에 연등천장을 설치하였다. 바닥의 구성은 바닥 전체를 누마루로 깐 무실형(無室形) 정자이다. 대지의 위치가 높기 때문에 누마루가 높지 않다. 또 3면(面)을 평난간으로 돌린 단촐한 정자이나 서까래와 부연을 둔 겹처마로 단청은 호화롭다.

[문화재 정보]
*지정종목 : 문화재자료
*지정번호 : 전남문화재자료 제18호
*지정연도 : 1984년 2월 29일
*시대 : 조선
*종류 : 누정

산청 단속사지 동 삼층석탑

산청 단속사지 동 삼층석탑

19960     2020-02-21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호암로673번길 12-1

단속사 옛터의 금당터 앞에는 동서로 두 탑이 서 있는데 그 중 동쪽에 세워진 것이 이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전형적인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층은 ‘ㄴ’자 모양의 돌을 이용해 바닥돌과 동시에 만들어졌다. 그 위로 기단을 한층 더 올린 후 몸돌과 지붕돌을 교대로 쌓은 탑신을 올려놓았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머리장식의 일부가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상·하의 비례가 알맞고 위로 오를수록 탑신의 크기가 알맞은 크기로 구성되어 있어 그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함께 세워져 있는 서탑과 비교할 때 그 규모와 수법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쌍탑의 배치와 더불어 주목되는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조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단속사지에는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유명한 화가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상(維摩像)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삼층석탑은 신라중기 이후의 전형적인 신라양식을 갖추고 있다. 특히 기단부(基壇部)가 상·하 2층이며, 하층의 탱주(撑柱)가 2주이고 상층의 탱주가 1주인 점은신라 중대 이후의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동탑은 서탑과 그 규모와 건조(建造) 수법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으며, 상·하의 비례가 알맞고 석재의 구성에도 규율성이 있어 보인다.

도천서원

도천서원

21469     2020-02-21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문익점로 34-32

이곳은 고려(高麗) 때의 문신(文臣)이며 우리나라에 목화를 처음 들여온 것으로 유명한 문익점(文益漸) 선생의 연고지(緣故地)로, 1461년(세조 7)에 나라에서 선생을 추모하는 사당(祠堂)을 세웠었다. 사당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으며 1787년(정조 11)에는 도천서원이라고 사액을 받았다. 그 뒤 권도(權濤)를 추가 배향하였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페령으로 철폐되었으나 1891년(고종 28)에 단성(丹城) 사림(士林)들에 의하여 노산정사(蘆山精舍)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5년 사당인 삼우사(三憂祠)를 재건하고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산청 조식 유적

산청 조식 유적

19515     2020-02-21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조선 중기의 유명한 유학자인 남명 조식의 유적이다. 조식 선생은 많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하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평생을 보냈다. 이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絲里)에는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院里)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에 세웠고, 앞면 5칸, 옆면 2칸의 현재 건물은 1926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세심정은 선조 15년(1582)에 처음 세웠다.

[전문설명]

조식유적(曺植遺跡)은 조선중기(朝鮮中期)의 위대(偉大)한 유현(儒賢)이며 뛰어난 실천(實踐) 도학자(道學者)였던 남명선생(南冥先生)이 만년(晩年)에 강학(講學)하던 산천재(山天齋)를 비롯하여 사후(死後) 그를 모시던 덕천서원(德川書院) 등을 일괄(一括) 지정(指定)한 유적지(遺跡地)이다.남명(南冥) 조식(曺植)(燕山君 7년(年) 1501∼선조(宣祖) 5년(年), 자건중(字楗仲), 별호산해(別號山海), 본관창녕(本貫昌寧))은 남다른 재질(才質)과 용공(用工)(절제(節制))으로 일찍부터 학덕(學德)을 갖추어 대성(大成)하였으나 사환(仕宦)(벼슬)에는 나아가지 않고, 평생(平生)동안 선비와 처사(處士)(산림(山林))로써 굳건히 일관(一貫)하였다. 38세 때 헌릉참봉(獻陵參奉)을 시작으로 여러 번 벼슬이 제수(除授)되고 왕(王)이 면대(面對)하기를 청(請)(징소(徵召)) 하였으나 매번 상소(上疏)(봉사(封事))로써 의견(疑見)을 개진(開陣) 하였을 뿐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66세(명종(明宗) 21, 1566)되던 해 10월(月) 초(初)에 상경(上京)하여 왕(王)을 잠시(暫時) 뵈옵고는 곧 귀향(歸鄕)하였다.

사후(死後) 광해군(光海君) 7년(年)(1615)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경상도(慶尙道)의 북(北)(안동(安東))과 남(南)(진주(晋州))에서 동년생(同年生)으로 다같이 불세출(不世出)의 홍유(鴻儒) 석덕(碩德)에 이른 퇴계이황(退溪李滉)이 연구(硏究)와 사색(思索)과 저술(著述)을 통해 천도(天道)(이치(理致))를 밝힘에 보다 힘썼다면, 남명(南冥)은 반궁(反窮)(자성(自省))과 체험(體驗)과 실천(實踐)을 통해 의리(義理)의 숭상(崇尙)(시폐(時弊)의 구제(救濟))에 보다 힘썼다고 할 수 있다.남명(南冥의 학문(學問)은 스스로 강조(强調)한 바와 같이 경의(敬義)로써 대표(代表)되는데 경(敬)은 안으로 궁리명선(窮理明善)하는 용공(用工)이며 의(義)는 경(敬)한 바를 밖에서 실행(實行)하는 용단(勇斷)으로도 이해(理解)될 수 있을 것 같다. 이같이 고고(孤高) 강의(剛毅)한 기상(氣象)을 깔고 있는 남명(南冥)의 학풍(學風)은 최영경(崔永慶), 정인홍(鄭仁弘), 정구(鄭逑), 김우옹(金宇옹) 등 발군(拔群)의 여러 제자(弟子)들을 통해 후일(後日)에 이르도록 퇴계(退溪)나 율곡학파(栗谷學派)와는 구별(區別)되는 독특(獨特)한 학맥(學脈)으로 전승(傳承)되었다.

특히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있어서는 주지(周知)하는 바와 같이 곽재우(郭再祐)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등 경상우도의병(慶尙右道義兵)의 주축(主軸)이 이 문하(門下)에서 군기(群起)하여 국난극복(國難克服)에 크나큰 공덕(功德)을 세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제(高弟) 정인홍(鄭仁弘)이 그 후(後) 대북파(大北派)의 영수(領袖)로서 광해군(光海君) 정권(政權)과 연계(連繫)되고 처형(處刑)된 까닭에 조선후기(朝鮮後期)는 물론(勿論), 금일(今日)에 있어서도 남명(南冥)에 대한 이해(理解)와 평가(評價) 및 천양(闡揚)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實情)이다.남명(南冥)은 현(現) 합천군(陜川郡) 삼가면(三嘉面) 토동(兎洞)(외토리(外吐里))에서 생장(生長)하고, 30세(歲)되던 중종(中宗) 25년(年)(1530)에 처향(妻鄕)이던 현(現) 김해군(金海郡) 대저면(大渚面) 탄동(炭洞)(주박동(主薄洞))으로 옮기어 산해정(山海亭)을 지어 경의(敬義)공부에 몰두(沒頭)하였다.

48세(명종(明宗) 3, 1548)에 다시 향리(鄕里)(토동(兎洞))로 돌아와 학복당(鶴伏堂)과 뢰용정(雷龍亭)을 지어 찾아드는 많은 학자(學者)(문인(門人))을 가르쳤고, 61세 되던 명종(明宗) 16년(年)(1561)에 이곳 사리(絲里)(사륜동(絲綸洞), 당시는 진주목(晋州牧) 덕천동(德川洞))로 재차(再次) 옮겨 산천재(山川齋)를 지어 제생(諸生)에게 강학(講學)하던 중(中) 11년(年) 후(後)에 서거(逝去)하였다. 그러므로 현재(現在) 김해(金海)의 산해정(山海亭), 삼가(三嘉)의 뢰용정(雷龍亭)(경북문화재자료(慶北文化財資料) 제(弟)129호(號)) 등도 남아 있으나 만년(晩年)에 거처(居處)하던 이곳 일대(一帶)가 남명(南冥)의 유적지(遺跡地) 중 가장 대표적(代表的)인 곳이다.이같은 실정(實情)을 고려(考慮)하여 1984년(年) 1월(月)에 이르러 이곳 유적(遺跡)의 각 건물(建物)이나 석물(石物)이 갖는 문화재적(文化財的) 평가(評價)보다도 그 전체(全體)를 일괄(一括)하여 남명(南冥)선생의 학덕(學德)과 교육(敎育)(강학(講學))을 오늘날에 되살려 숭앙(崇仰) 천양(闡揚)하는 상징적(象徵的) 중심체(中心體)(기념물(紀念物))로써 사적(史蹟) 제(弟)305호(號)로 지정(指定)하였다.조식유적(曺植遺跡)은 크게 산천재권역(山天齋圈域)(사리(絲里))와 약 1km 서방(西方)에 떨어져 있는 덕천서원권역(德川書院圈域)(원리(院里))으로 나뉘어지고, 전자(前者)는 다시 강변(江邊)에 자리한 산천재(山天齋)와 그 외(外)의 유적(遺跡)이 진주(晋州)∼지리산간대로(智異山間大路)로 인(因)해 양분(兩分)되어 있다.

명곡서원

1425     2020-02-21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신기길 63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신기리에 소재하고 있다.문헌공 충( 沖)을 주벽으로 하여 문화공 유선(惟善).문청공 자(滋).부제학 만리(萬理).좌승지 19世 諱:우(遇)(號:湖隱)을 배향하고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해주 최씨 세장비가 자랑스럽게 서 있다.제일은 음력 3월 初丁日이며 유림향사로 행례한다.

박산서원

1924     2020-02-21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박산죽현길 107-56

1590년(선조 23) 강진읍 서산리 월남마을에 청연 이후백을 제향하기 위해 서봉서원이라는 명칭으로 창건하였다. 1924년 호남 사람들의 발의로 현 위치로 옮겨 박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창건 이후 1694년(숙종 20)에는 전라도 진사 김증등이 청액소를 올렸는데 관철되지 않았다. 서원 등록은 1694년 10월 10일에 등록되었고, 1712년 이후백의 제자인 백광훈과 최경창을 추배하며 제향하여 오다가 1725년(숙종 38)에 전라도 유생 김면등이 조정에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게 되는데 이 역시 관철되지 않았다. 그 후 1868년(고종 5)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1924년 본향인 호남 사림의 발의로 현재의 작천면 박산으로 옮겨 복설하고 액호도 ‘박산서원’ 이라고 개칭하였다.

공주 정지산 유적

20176     2020-02-21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 공주 정지산 유적 *

1998년 7월 28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47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립공주박물관의 발굴조사 실시 결과 국가차원의 제의시설로 추정되는 중요 유적으로 평가되어 2006년 11월 6일 사적 제474호로 지정되었다. 백제의 왕실제사유적으로 공주 송산리 고분군(公州宋山里古墳群:사적 13)과 인접한 곳에 있다. 시설물은 기존의 가옥을 모두 철거한 후 능선을 깎아내고 넓고 평탄한 대지에 만들어졌으며 공산성이 바라보이는 남동쪽으로는 약 세겹 내지 다섯겹의 나무울타리를 돌리고 송산리 고분군쪽으로 연결되는 능선에는 약 1m 내외의 좁은 출입구만 남긴채 너비 5m, 깊이 2m 이상의 넓고 깊은 도량을 파고 내부에 몇채의 건물을 축조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화려한 장식이 부착된 장고형 그릇받침 등 국자세자와 관련된 유물이 수집되었다.

* 정지산 유적의 의의 *

유적은 인접한 송산리고분군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웅진시기 백제의 국가적 제사시설일 가능성이 높으며, 내부 시설물도 국내에서 최초로 조사된 특수한 구조물이어서 자료가 지극히 부족한 백제사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 면적 - 11,775㎡
* 소유자 - 건교부 및 사유(김해김씨종중)

단양향교

2417     2020-02-21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충혼로 26

1415년(태종 15)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명종 초기 이황(李滉)이 군수로 있을 때 현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명종 후기 군수 황준량(黃俊良)이 명륜당을 건립(建立)하였다. 영조 때 군수 박필부(朴弼溥)와 조정세(趙靖世)가 두 차례 중수하였고, 정조 때 군수 조경진(趙景鎭)이 명륜당을 중수하였으며, 1971년과 1977에 각각 중수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7칸반의 대성전을 중심으로 서무(西廡)·명륜당·동무(東廡)·신문(神門)·진덕재(進德齋)·수업재(修業齋)·풍화루(風化樓)·제기고 등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 향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1명에 장의 (掌議) 여러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소장하고 있는 전적은 판본(版本) 5종 42책, 사본(寫本) 11종 15책이 있으며, 이 중 ≪서재유안 西齋儒案≫·≪향계절목 鄕稧節目≫·≪청금록 靑衿錄≫·≪향교서재안 鄕校西齋案≫·≪향교위전답안 鄕校位田畓案≫ 등은 이 지방 향토사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이다.

수북정

19720     2020-02-21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

* 부여팔경 중 하나인, 수북정 *

수북정은 부여팔경(扶餘八景)의 하나로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동에는 부소산(扶蘇山)과 나성(羅城)이 있고 정자 밑에는 백마강(白馬江)이 맑게 흐르고 있다. 수북정은 조선 광해군(1608∼1623) 때 양주(楊州) 목사(牧使) 김흥국(1557∼1623)이 건립하였다 하며, 그의 호를 따서 수북정이라 불린다. 김흥국(金興國)은 김장생(金長生), 신흠(申欽) 등과 친교가 매우 깊었으며, 지금도 신흠의 수북정(水北亭) 팔경시판(八景詩板)이 걸려 있다. 수북정은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다.

* 왕의 행차를 반기는 바위, 자온대 *

수북정 아래쪽에 있는 자온대(自溫臺)는 백제시대왕이 왕흥사(王興寺)에 행차할 때 이 바위를 거쳐가곤 했는데, 왕이 도착할 때마다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구들돌이라 명명했다 한다. 이 전설에 따라 자온대라 불려오며, 암벽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자온대(自溫臺)라고 쓴 친필이 음각 유존(遺存)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