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28095     2019-04-19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석주관 칠의사묘는 정유재란 때 구례지방으로 침입하여 왜구를 막기 위해 석주관성에서 적을 맞서 싸우다 장렬히 순절한 구례현감 이원춘을 비롯 왕득인,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등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가꾸어진 유적으로 사적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석주관 칠의사단에는 높이 77㎝, 폭 29.5㎝, 두께 12㎝의 똑같은 규모의 칠의사 단비(壇摳)가 세워져 있는데 왼쪽으로부터 이원춘, 왕득인, 왕의성,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의 순서로 모셔져 있다. 한편 석주관 칠의사 유적의 입구 우측에는 새로이 칠의사의 정신을 기리고자 기념관을 건립하였는데 사당으로 보이는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와가로 되어있고 내삼문 밖에는 동·서재(東·西濟)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인데 동재는 팔작지붕이고 서재는 맞배지붕이며 그외 외삼문 등이 갖추어져 있다.

무안 식영정

무안 식영정

18737     2019-04-19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호반로 562-15

* 영산강 유역의 대표적 정자, 식영정(팽나무) *

식영정은 한호(閑好) 임연(林煉, 1589~1648)선생이 1630년에 무안에 입향 이후 강학소요처로 지은 정자로 그의 호인 한호처럼 한가로움을 좋아한다는 취지로 그림자가 잠깐 쉬었다 가는 곳이라 하여 식영정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영산강과 그 주변의 경관과 어울려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았으며, 임연의 증손으로 동사회강을 지은 문인학자인 노촌 임상덕(林象德1683~1710)이 제현과 교류하는 등 무안 몽탄 이산리의 나주임씨 강학교류 공간이었다. 무안 이거와 경관, 정자 건립 등에 관해서는 1643년에 임연이 지은 복거록에 잘 나타나 있고 교류한 문인도 많다. 식영정은 창건주 임연의 증손인 노촌 임상덕 등 대를 이어가면서 교류공간으로 활용되었다.

* 식영정의 구조 *

식영정은 측면에서 보면 영산강 유역의 대표적 정자라 해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정자의 입지나 주변의 경관도 뛰어나다. 현재의 건물은 1900년대 초반에 중건한 건물이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건물로 팔작지붕이다.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어 그 원형을 알 수 없는 낮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통형의 원주(圓柱)를 세웠다.가구(架構) 형식은 2고주(高柱) 5량(樑) 구조로서, 종도리와 주심도리는 굴도리로, 중도리는 납도리로 되어 있고 마루대공은 판대공(板臺工)으로 되어 있다. 중앙의 마루방 3면에는 사분합문이 설치되어 들쇠에 매어달게 되어 있으며 후면 벽에는 다락이 있다.

[문화재 정보]
지정종목 : 문화재자료
지정번호 : 전남문화재자료 제237호
지정연도 : 2002년 4월 19일
시대 : 조선
종류 : 정자
규모 : 건물 1동 - 정면 3칸, 측면 2칸, 팔짝 단층와가

삼척 척주동해비 및 평수토찬비

삼척 척주동해비 및 평수토찬비

22411     2019-04-19

강원도 삼척시 허목길 13-9

*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

척주동해비 비문은 삼척 부사 허목이 지은 것으로 비의 규모는 높이 170cm, 높이 76cm, 두께 23cm이다. 현종 3년(1662)에 건립한 '척주동해비'는 일명 '퇴조비(退潮碑)'라 불리듯이 조류(潮流)의 피해를 막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당초에는 만리도에 건립되었다. 이후 숙종 34년(1708) 풍랑으로 비석이 부러져 바다에 잠겼던 것을 동왕 35년 부사 홍만기가 문을 본떠서 다시 새겼으며, 동왕 36년 삼척 부사 박내정이 죽관도 동쪽에 다시 건립하였다가 1969년 12월 6일 현재의 위치인 육향산 산정에 이건하였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각의 전면에 "척주동해 비각" 제액과 후면에 "동해비각" 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평수토찬비 비문 역시 삼척 부사 허목이 짓고 쓴 것이다. 중국형산비(衡山碑)의 대우수전(大禹手篆) 77자 가운데 48자를 가려서 새긴 것으로,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린 글이다. 현종 원년(1661) 목판에 새기어 읍사(邑司)에 보관되어 오다가 240여년 후인 광무 8년(1904) 칙사(勅使) 강홍대와 삼척군수 정운철 등이 왕명에 의해 석각하여 죽관도에 건립하였다. 비의 높이는 145cm, 폭72cm,두께 22cm이며, 비각의 전면에 "우전각(禹篆閣)" 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 대한평수토찬비(平水土讚碑) *

평수토찬비 비문 역시 삼척 부사 허목이 짓고 쓴 것이다. 중국 형산비(衡山碑)의 대우수전(大禹手篆) 77자 가운데 48자를 가려서 새긴 것으로,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린 글이다. 현종 원년(1661) 목판에 새기어 읍사(邑司)에 보관되어 오다가 240여년 후인 광무 8년(1904) 칙사(勅使) 강홍대와 삼척군수 정운철 등이 왕명에 의해 석각하여 죽관도에 건립하였다. 비의 높이는 145cm, 폭 72cm, 두께 22cm이며, 비각의 전면에 "우전각(禹篆閣)" 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 명칭 - 삼척척주동해비및평수토찬비 (三陟陟州東海碑및平水土讚碑)
▶ 분류 - 석비
▶ 수량 - 1기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국유

고산서원

17731     2019-04-19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고산로 68

1982년 10월 15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었다. 기정진이 1878년(고종 15)에 정사(精舍)를 지어 담대헌(澹對軒)이라 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후손들이 1924년 중건하였으며, 1927년에 고산서원(高山書院)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1994년 사당과 주변 담장을 보수하였다. 경내에는 강학공간에 외삼문·강당·거경재(居敬齋)·집의재(集義齋)가, 제향공간에 내삼문·고산사(高山祠)가 있다. 사당에는 기정진을 주향으로 이최선(李最善)·기우만(奇宇萬)·조의곤(曺毅坤)·김록휴(金錄休)·조성가(趙性家)·정재규(鄭載圭) 등 5위가 배향되었다. 1985년 설립한 장판각에 《노사문집(蘆沙文集)》 목판 980매와 《노사집》 12편(1질)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방호정(구례)

23293     2019-04-19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

지리산의 한 골짜기의 빼어난 승경지에, 당연히 정자가 앉아야 할 자리에 있는 방호정은 이 지역 유림(儒林)들이 뜻을 모아1930년에 건립하였다. 여기서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을 시로 달래며 소일하였다고 한다. 계곡의 거대한 암반 위에 축대를 쌓아 대지를 형성하였다. 좌우와 전면은 누마루를 깔았다. 뒷면은 심벽과 판장벽을 두었고 방의 3면은 모두 4분합 들어 열개문으로하여 걸쇠로 서까래에 걸어 매달았다. 뒷면을 제외한 3면에는 계자 난간을 돌렸는데 하엽과 두겁대 부분이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 정자 내부에는 기문 40여개가 걸려 있다. 방호정 건립과 함께 결성된 방호정 시사원(詩社員)은 매년 봄과 가을에 두 번의 시회(詩會)를 열어 옛 선비들이 자연을 노래하며 노는(음풍농월) 흥취를 계승하여 왔으며 1936년 정자의 왼쪽 암벽에 시사원의 이름을 새겨 두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23554     2019-04-19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26

* 가야의 성립과 전개를 해명하는 가장 좋은 유적, 대성동고분군 *

대성동유적은 가야의 건국설화가 깃든 구지봉(龜旨峰)과 김해패총(金海貝塚)으로 유명한 회현리 패총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인접하여 김수로왕릉이 있다. 즉, 공설운동장의 바로 북쪽 뒤편에 표고 22.6m의 '왜(애)꼬지'라 불리는 구릉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 유적은 경성대학교박물관에서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차에 걸쳐서 발굴 조사를 한 결과 금관가야 지배자집단의 공동묘역으로 판명되었다. 입지조건이 좋은 구릉의 능선부에는 왕 묘와 이에 상응하는 지배자의 무덤이, 경사면에는 보다 신분이 낮은 자들의 무덤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유적의 발굴은 경성대학박물관이 1990년 6~7월, 1990년 9월~1991년 4월 등 2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였다. 1차에서는 4세기 말~5세기 초 본가야(금관가야)의 왕급 무덤 2기(基)를, 2차에서는 3세기 후반~5세기 전반에 이르는 다수의 왕후묘(王侯墓)가 포함된 37기의 각종 분묘를 발굴조사하여, 한국 고대사에서 공백으로 남은 4세기 전후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 대성동고분군의 역사적 의의 *

조사된 무덤은 총 136기로서 종류는 목관묘(木棺墓), 목곽묘(木槨墓), 옹관묘(甕棺墓), 석곽묘 (石槨墓),횡혈·횡구식석실묘(橫穴·橫口式石室墓)이다. 이 가운데 목곽묘가 묘제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구릉의 능선부에 형성된 대형의 목곽묘들은 매장주체부의 크기와 부장유물의 질과 양에서 3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걸쳐서 형성된 금관가야 지배자들의 무덤이며 특히 이 유적의 대형 목곽묘(木槨墓) 조사를 통해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 3세기 말을 기점으로 하여 처음으로 사람과 말(馬)을 순장(殉葬)하고,무기를 구부려 부장하는 습속과 함께 기마용(騎馬用)의 철제갑주(鐵製甲胄), 북방 유목민족적 묘제, 마구류(馬具類), 도질토기(陶質土器), 오르도스형 동복(銅復)등 북방유목민족의 습속과 유물이 다량으로 반영되거나 출토되고 있는 사실이다. 둘째, 통형동기(筒形銅器), 파형동기(巴形銅器), 각종 벽옥제(碧玉製)의 석제품(石製品) 등 고대 일본과의 교섭실태를 구명할 수 있는 자료의 출토 등이다. 이와 같이 대성동유적은 가야의 성립과 전개, 성격, 정치·사회구조를 해명하는데 으뜸가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목포시사

24645     2019-04-19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로 165

* 시문을 가르치고 백일장을 행하던 곳, 목포시사 *

유달산(儒達山) 정문에서 조각공원 쪽으로 약 2㎞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목포시사는 본래 1890년에 하정 여규형(呂圭亨) 등이 건립하였다. 초기에는 유산정이라 부르며 문인들에게 시문을 가르치고 백일장 등을 주도하던 곳이었다. 이후 1920년에 무정 정만조(鄭萬朝)가 재확장하여 유산사로 개명하고, 1932년에 중수하였으며, 1937년 목포시사를 발족하였다. 목포시사는 40.49m²(12.25평) 크기의 목조 기와로 되어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전면에는 마루를 깔았다. 창문의 중앙 2칸은 세 짝 정자살문이고, 좌우 양칸에는 두 짝 문을 달았다. 측면과 뒷면의 중방은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벽돌로 쌓았으나, 1979년과 1984년 2회에 걸쳐 벽돌을 제거하고 보수하였다.

* 자연과 시를 노래했던 곳, 시사란? *

시사란 문사들이 서로 시문을 독려하고 자연과 시를 노래했던 풍류의 장소로, 목포시사는 시인묵객들의 단순한 모임을 넘어 망국의 한과 우국충정을 토로하는 유림의 문학결사단체였다. 특히 한말의 유학자 정만조는 이곳에 머물며 퇴폐한 유풍을 바로잡고 학풍을 진작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문화재 정보]
지정종목 : 시도기념물
지정번호 : 전남기념물 제21호
지정연도 : 1976년 9월 30일
시대 : 대한제국
종류 : 개화기 건축

창녕향교

17463     2019-04-19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향교길 54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효종연간에 중건되었고, 1913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대성전과 동무(東廡)·서무(西廡)를 중건하였으며, 1926년 풍화루(風化樓)와 1959년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1960년 화재로 풍화루가 소실되었다가 곧 재건하였고, 1972년 전사청을 옮겨지었다. 1976년 내삼문을 재건하고 1980년 동재(東齋)·서재(西齋)를 복원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각 3칸의 동무와 서무, 명륜당, 동재와 서재, 내삼문(內三門), 풍화루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의 위패가, 동무·서무에는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소장전적 가운데 ≪창녕향교직원임록 昌寧鄕校直員任錄≫·≪창녕유림노유안 昌寧儒林老儒案≫·≪창녕유안 昌寧儒案≫·≪노비안 奴婢案≫·≪교임안 校任案≫·≪향교수미교구절목 鄕校需米撟捄節目≫ 등은 이 지방의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김해향교

18720     2019-04-19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150번길 21

1408년(태종 8)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0년(선조 33) 부사 정기남(鄭奇男)이 김해읍 동쪽 다전동에 중건하였다. 1683년(숙종 9) 향교 뒷산이 사태로 무너지자, 1688년에 김후수(金後修)와 부사 이행익(李行益)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대성전과 동무·서무를 건립하였고, 이듬해에 동재·서재를 건립하였다. 1693년 부사 이하정(李夏禎)이 명륜당과 남루(南樓)를 중건하였으며, 1769년(영조 45) 화재로 소실되자 이듬해 재건하였다. 1880년(고종 17)에는 김익성(金益成)이 중수하였고, 1887년에는 교궁을 보수, 단청하였으며, 내삼문(內三門)도 수리하였다. 1904년에는 군수 이근홍(李根洪)이 중수하였고, 1972년 대성전·명륜당·삼문(三門)을, 1975년 서무(西廡)를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교육적 기능이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 장의(掌議) 여러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이 향교는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소장 전적 가운데 ≪김해향안 金海鄕案≫·≪김해효열전 金海孝列傳≫ 등은 향토사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관산서당

1486     2019-04-18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월미상월길 115

1620년(광해군 1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구(鄭逑), 강흔(姜訢), 안여경(安餘慶)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1년(숙종 37)에 ‘관산’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광산서당

15371     2019-04-18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유어장마로 415

조선 시대 병자호란 때 창녕 일대의 의병을 모아 남한 산성을 포위한 청국병을 격퇴하기 위하여 종군한 양휜의 충의를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던 이 곳은 서고까지 겸비한 건물로 "崇禎紀元 戊辰後 正回乙亥正月三十日 酉時 竪柱 二月二十日 酉時上樑"이란 묵서가 있어 1935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소곡서당

2023     2019-04-18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우천길 111

소곡서당은 1650년경 창건된 소곡서원이 창건 200여년 후 퇴락됨에 따라 1856년(철종 7) 당초 서원 터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북쪽 산기슭에 지금의 소곡서당을 건축하고 청민공(淸敏公) 노변소(盧抃素), 만취공(晩翠公) 참봉(參奉) 노침(盧沈), 절효공(節孝公) 진사(進士) 노홍언(盧弘彦) 3인을 합향(合享)하다가 대원군의 서원 훼철시 피해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