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간현관광지

간현관광지

75282     2019-02-15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소금산길 26

※ 소금산 출렁다리 : 3월부터 정기휴장일 운영
- 설날 당일, 추석 당일, 매월 첫째주, 셋째주 월요일 휴장

* 원주시에 있는 국민관광지, 간현관광지*

원주시에서 서쪽으로 18km 떨어져 있는 간현관광지는 남한강 지류인 섬강과 삼산천이 합쳐지는 지점에 자리한 유원지이다. 강 양쪽에 40-50m 높이의 기암괴석들이 울창한 고목, 검푸른 강물과 조화를 이루며 강변에는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또한, 맑은 강물이 흐르고 백사장이 넓어 여름철이면 물놀이 피서객으로 붐빈다.

* 간현관광지의 즐길거리 *

관광 단지 맞은편의 간현암은 37개소의 바윗길이 생겨 암벽타기를 할 수 있다. 또한 수시로 변하는 유수의 흐름과 수심의 변화로 매우 위험하여'삼산천 에서의 물놀이는 매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며, 하천에서의 야영,취사,모닥불 피우기, 낚시 등도 금지되어 있다. 간현관광지 내 소금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소금산 출렁다리는 왕복 1시간20분 정도가 걸리며 산악도보교 중 국내 최장, 최고의 규모(높이100m, 길이200m, 폭1.5m)를 자랑한다. 교랑바닥은 이용객들에게 짜릿함을 주기위한 스틸그레이팅으로 특수제작 했으며, 바닥을 내려보는 아찔함과 스릴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해인사(합천)

해인사(합천)

81144     2019-02-15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 3대 사찰의 하나인 문화재 보고, 해인사 *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순응,이정 두 스님이 창건하였으며,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연유되어 법보종찰로도 유명하다. 고려 태조는 이 절에 머물렀던 희랑이 후백제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로 삼고 전지 500결을 하사했다. 해인사는 법보종찰이요, 화엄십찰의 하나이다. 최치원의 가야산 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 의하면 해인사는 순응, 이정 스님에 의하여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되었는데, 그때 왕의 조대비 성목태후가 대시주였다고 한다. '해인'이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유래된 것으로 해인사는 화엄사상을 천명하고자 이루어진 도장이다. 해인사를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법보사찰이라 부르는 것은 해인사 대장경판전에 고려대장경판인 법보가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인사에는 대장경판전, 대적광전, 명부전, 독성각, 응진전, 응향각, 퇴설당, 해행당, 심검당, 궁현당, 경학원, 적묵당, 관음전, 구광루, 보경당, 대장경보전연구소, 명월당. 사운당, 청화당, 범종각, 우화당, 해탈문, 천왕문, 일주문 등 많은 전당이 있다. 부속암자로서는 원당암을 비롯하여 홍제암, 용탑선원, 백련암, 지족암, 희랑대, 삼선암, 금선암, 약수암, 국일암, 보현암, 금강굴, 길상암, 고운암, 간월암, 청량사 등이 있다.

* 템플스테이 *

템플스테이는 자연환경과 불교문화가 어우러진 사찰에서 수행자의 일상을 체험하며 마음의 휴식과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일이다.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을 위한 전통사찰의 예절과 수행법을 통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개인이나 단체 등 누구나 참석할 수 있으며, 참된 '나'를 찾아가는 프로그램으로 마음의 평온과 활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문화재 *

고려팔만대장경판 (국보 제32호), 대장경판전 (국보 제52호), 반야사원경왕사비(보물 제128호), 월광사지삼층석탑(보물 제265호),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마애불입상(보물 제222호), 청량사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 제265호), 청량사삼층석탑(보물 제266호), 지방문화재 제253호 길상탑 등이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3호인 광해군내외 및 상궁 옷들과 100여 종의 국보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대적광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화엄종 사찰의 중심 법당이다.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처럼 우주에 가득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자체를 상징하는 불상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 이외에도 화엄전과 비로전이 있다. 이곳은 대적광전은 802년(애장왕 3)에 순응,이정 두 스님이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비로전이었으나, 1488년(성종 19)에 왕실의 지원에 의해 학조대사가 중창하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의 건물은 1817년(순조17)에 불타버려 이듬해 중건한 것을 1971년에 지관스님이 다시 중수한 것이다. 큰 절의 중심 불전에 걸맞게 정면5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한 우람한 모습이다. 정선이 그린 해인사 그림에는 대적광전이 2층으로 그려졌는데,1817년의 화재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큰 건물이었을것이다. 지금 이 모습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다포계 팔작집으로서 중수과정에서 많이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당 안에는 용기사에서 옮겨온 중앙의 큰 비로자나불을 비롯해 법단의 좌에서 우측으로 법기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비로자나불(대), 비로자나불(소),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순으로 일곱분의 불보살님이 봉안되어 있는데 비로자나불과 지장보살이 함께 모셔진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주변지역의 불타버린 법당에 있던 지장보살을 옮겨 놓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해인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5호 석등은 부처님이 계신 사찰에 어둠을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등 공양과 관계된 것이므로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과 함께 법당 앞에 설치된다. 이 석등 역시 원래 석탑 앞에 있었지만 현재 위치로 옮겨놓았다. 옮겨진 이유와 시기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석등은 받침돌과 기둥돌, 등불을 놓는 화사석, 지붕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돌이 원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의 크기는 알 수 없다. 맨아래 네모난 받침대에는 코끼리 눈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었으며, 8각형의 아래 위 받침대에는 8장의 연꽃잎을 각각 따고 하늘을 향하도록 새겨넣었다. 화사석에는 4개의 창을 두었는데, 창 사이의 모서리 4면에 각각 사천왕상을 돋을새김한것이 이채롭다.지붕돌은 역시 8각으로 처리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었으며 맨 위에는 둥근 구슬을 올렸다. 새겨진 눈 모양과 연꽃무늬의 우아한 조각수법, 그리고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398년 조선 태조 7년에 강화 선원사에 있던 팔만대장경을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팔만대장경판전은 1995년 12월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공식지정되었다. 경내에는 일주문, 대적광전,구광루 등 문화재 및 암자들이 즐비하여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해인사 3층석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4호 이 탑은 2중 기단과 3층의 탑신 및 지붕돌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원래 이 탑의 받침은 신라 석탑 양식인 2중이었으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하면서 받침을 확장하고 한 층을 더 올려, 본래 지니고 있던 조화미를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4면의 각 모서리에 기중을 새긴 것 외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지붕돌받침은 신라 석탑의 전형인 5층으로 되어 있고, 지붕돌 추녀 끝은 살짝 들어올려져 완만하게 처리되었다.지붕돌의 각 모서리에는 작은 종이 달려있는데, 본래의 것은 없어지고 나중에 다시 매단 것이다. 탑의 꼭대기 역시 일부가 소실되어 꼭대기를 떠받치는 받침대와 위로 핀 연꽃, 바퀴만 남아있다. 1926년 6월에 이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상층 받침의 돌 함 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석탑을 수리하고 나서 이들 불상을 다시 탑 안에 봉안하였다. 또 이 석탑 앞에는 코끼리의 눈모양을 형상화했다는 안상과 연꽃무늬가 조각된 배례석이 있었으나 수리하는 과정에서 석등 앞으로 옮겨졌다. [조선불교통사] 에는 태조가 즉위하여 이 탑을 수리할 때, 대장경을 탑 안에 봉안하면서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평안을 빌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할때 대장경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조가 수리한 탑이 이 탑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더욱이 근래의 사찰 보수 때 경학원 근처에서 신라 석탑의 재료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또 다른 석탑이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하겠다.

[가야산]
가야산은 법보종찰 해인사의 주산이며 해발 1,430로서 소백산맥의 한 지맥으로 팔경중 하나이다.

영산일 뿐만아니라 조선조 세조대왕은 가야산은 천하명산이며, 생불주처라 하였고, 초대 주한 프랑스대사를 역임한 로제샹바르씨는 가야산의 승경과 고려팔만대장경판에 감복되어 마지막 유언에 나의 유해를 분말하여 해인사에 뿌려달라 하였으므로 1982년에 임종하고 해인사 천불동에 뿌려졌다. 무릉교에서 시작하여 홍류동 계곡은 홍송이 울창한 장장 10리여의 수석과 송림으로 이어져 다른 어떤 사찰과 명산에서도 보기 어려운 경관을 지니고 있다.

[합천 학사대 전나무]
경상남도 기념물 제 215호 이 전나무는 높이 약30m, 둘레 5.1m 쯤 되는 수령이 1,000년 이상 된 고목이다. 나무의 줄기가 지상 10m 높이에서 두 개로 벌어져 있으며, 나뭇가지가 아래로 향해 뻗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할 때 찾았던 곳이다. 학사대라는 이름은 고운 선생이 헌강왕때 29세의 나이로 한림학사 벼슬을 하였는데 그 벼슬이름을 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말년에 제자들 앞에서 이 곳에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 는 유언을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유유히 홀로 들어가신 전설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전나무를 일러 고운 선생의 "지팡이 나무"라고 불리운다.

[고사목의 유래]
이 나무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서기 802년)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의 기도로 애장왕후의 난치병이 완치되자 왕이 이 은덕에 보답코자 법당과 승료 등 많은 가람을 헌공하여 해인사를 창건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식수한 나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느티나무는 1,200여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해인사와 더불어 성장하여 오다가 1945년에 수령을 다해 고사하고, 지금은 둥치만 남아 해인사의 장구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국보 제52호 (1963년 12월 20일 지정)해인사 장경판전은 건물 자체가 특수할 뿐 아니라 고려대장경의 판전으로서 유명하며, 똑같은 규모 양식을 가진 두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세워져 있어 남쪽을 수다라전, 북쪽을 법보전이라 한다. 건물은 간단한 방식으로 가구하였고 세부 역시 간결하여 판전에 요구되는 기능을 충족시킬 목적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적 의장을 가하지 않았다.여러 가지 모양의 자연석 주춧돌 위에 배흘림이 큰 기둥을 세웠고, 기둥 위에는 기둥 머리에 해당되는 주두를 올려놓았다. 이 주두 위에는 대들보를 얹어 그것이 직접 주심도리를 받으며, 그 밑에는 간단한 익공이 있을 뿐이다. 마루보는 대들보 위에 놓인 동자주 위에 놓고 중앙에 같은 양식의 동자주를 놓아 마루도리를 받게 하였다. 이 동자주들은 모두 아랬 부분에 간단한 화반으로 고정시켰다. 몸통 부분은 짧은 모기둥이고, 머리부분에는 포작을 꾸몄다. 이 포작의 첨차는 보 밑을 받치는 쪽이 초공모양으로 되고, 도리 밑 장혀를 받치고 있는 것은 다포 양식의 첨차 및 소누와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 측면 2칸 규모의 수다라전, 법보전과 정면 2칸, 측면 1칸의 사간전인 동,서고 등 4동이 장방형의 구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수다라전과 법보전은 우진각 지붕이 고 동,서 사간전은 맞배지붕인데 그 가구는 창고 건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통풍을 배려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이 서로 다르게 하였으며 매칸마다 광창을 설치하고 장식적인 요소는 모두 없애 버렸다. 집의 가구 형식은 오양가이며, 대들보는 고주에서 합량되고 대공은 동자주 모양이나 복화반과 초공을 받쳤고 대공에는 솟을 합장을 끼웠다. 판전 내부는 흙바닥이며, 판가가 설치되어 있고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1964년 해체 수리를 하면서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상량문이 발견되었고 광해군 어의가 발견되어 보존하고 있다.

* 문화재의 보고, 해인사에 대하여 *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삼보 사찰의 하나이며 당에서 수도한 순응, 이정 두 대사가 신라말 애장왕 3년(802)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내에는 대소의 많은 법당이 있으나 그 대부분은 근세에 세워진 것이고 장경판전만이 조선 초기에 세워진 건물이다. 이 건물의 건립연대는 건물에 사용되었던 와당 또는 평와에 나타난 홍치 원년(1488)이라는 각명 등으로 추정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도 무사하였으나 오랜 세월에 낡았던 것을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전을 중수하고 1624년에는 법보전도 중수하였다.

[해인사 대장경판(팔만대장경)]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 하며, 또한 판수가 8만여판에 이르고 팔만 사천 번뇌에 대치하는 8만4천 법문을 수록하였다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의 침입으로 현종 때의 초조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긴 대장경이므로 재조대장경판이라고 하며,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해인사 대장경판이라 불리고 있다. 이 대장경판은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판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일 뿐 아니라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대장경판이다. 또한 이 대장경은 대장경 간행 역사에 있어 내용이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대장경판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1614년에 이 대장경을 바탕으로 하여 대장경 종존판을 새기다가 중도에서 포기한 일이 있고 그후 신연활자로 대일본교정숙쇄판대장경:1880~1885, 대일본속장경(1902~1912), 대정신수대장경(1924~1934)의 바탕이 되었으며 중국에서 불교대장경:1979과 현재 간행하고 있는 불광대장경:1983~현재의 바탕을 삼고 있을 정도로 그 내용이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간행기록을 조사해 보면 고려 고종 24년(1237)부터 35년 (1248년)까지 12년 동안 새겼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 16년이 걸린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은 준비 기간을 합산한 것이며,고려대장경판각 사업은 초조 대장경이 불타버린 이듬해인 고종20년(1233)경에는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새긴 대장경판은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대장경판의 특징은 무엇보다 이 사업을 주관했던 당시 개태사 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 등을 참고하여 내용을 비교하여 오류를 바로 잡은 데에 있다. 이때 수정한 내용은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에 수록되어 있다. 강화도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다가 신원사를 거쳐 태조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져 오늘까지 보관되고 있다.대장경판의 수는 일제 때 조사한 81,258장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대장경판이 아닌 조선조 때 판각된 것도 포함된 통계이다.

대장경의 판각을 위해서는 국가에서 대장도감이란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총괄하고 실제적인 판각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이러한 것은 경판의 간기와 경판에 새겨져 있는 각수를 조사하여 얻어낸 결론이다. 대장경판의 권말에는 을묘해 고려 국가대장도감봉칙조조등으로 간기가 기록되어 있고 각 경판의 권두제나 권미제 아래의 광곽 밖에 각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해인사 대장경판은 수천만개의 글자가 하나같이 그 새김이 고르고 정밀한 서각 예술품으로 우리 민족이 남긴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해인사의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해인사 길상탑]
길상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 석탑양식을 갖춘 탑으로 2층의 기단을 지니고 있으며, 특이한 점은 상층 기단이 하나의 돌로 조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탑신부에 비해 기단부가 낮고 넓어서 상당히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옥개받침은 각각 5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륜부는 노반(露盤)이상이 결실되었으나 노반에 지름 5.2㎝ 정도의 찰주(刹柱)를 꽂았던 원형 구멍이 남아 있다. 이 탑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중 소탑이 157개가 있으나 완전한 수량이 아니다. 이는 이 탑의 건립이 탑지(塔誌)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조탑경(造塔經)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의거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소탑은 원래 99개, 77개가 안치되는 것이 원칙이므로 19개는 망실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4매의 탑지는 23㎝의 정방형으로 두께 2.4㎝의 검은 전판(塼板)으로 만들어졌는데 명문은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찬(撰)한 것으로서 유명하다.

즉 건령(乾寧) 2년(신라 진성여왕 8년, 서기 895)을 전후한 7년에 걸친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창궐한 도적떼로부터 사보(寺寶)를 지키기 위해 힘쓰다 희생된 승속(僧俗)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이 탑을 건립했다는 사실과 함께 탑의 높이, 공장승(工匠僧), 탑 안에 납입한 법보(法寶)의 내용 및 탑을 건립하는데 소용된 비용 등을 기록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특히 탑의 높이를 일장삼척(一丈三尺)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비록 상륜부가 결실되었으나 현재 탑의 높이를 3m로 볼 때 이 탑의 조성에 당척(唐尺)이 적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당시 도량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뿐만 아니라 탑지의 기록에 따라 석탑건립에 소요된 비용과 물품 등은 당시의 사원 경제연구에 도움이 된다. 아울러 탑을 건립하게 된 배경 및 소요된 비용 등의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말기 혼란된 사회상을 비롯하여, 경제상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를 전해주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북촌한옥마을

171013     2019-02-15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길 37

북촌마을 방문 시 지켜야할 '에티켓'
- 단체관광객 방문시 반드시 가이드 동행
- 관광버스 불법주차 금지
- 무단 침입, 무단 촬영, 무단 투기, 노상방뇨, 소음 금지
- 마을 방문시간 준수

예로부터 북촌이라 하여 양반 동네로 알려진 이곳 주택은 모두 조선 시대의 기와집으로서 상류층의 구조 형태를 간직하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원래 이 동네에는 솟을대문이 있는 큰 집 몇 채와 30여 호의 한옥밖에 없었으나, 일제 말기와 6.25 수복 직후 지금의 상태로 늘어났다. 북촌한옥마을은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의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서울 600년 역사와 함께해온 우리의 전통 거주 지역이다. 거대한 두 궁궐 사이에 밀접하여 전통한옥군이 위치하고 있으며, 수많은 가지 모양의 골목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6백 년 역사도시의 풍경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전통문화체험관이나 한옥음식점 등으로 활용이 되어 간접적으로나마 조선시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예로부터 원서동, 재동, 계동, 가회동, 인사동으로 구성된 이 지역은 청계천과 종로의 윗 동네라는 이름에서 ‘북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당시로써는 왕실의 고위관직에 있거나 왕족이 거주하는 고급 주거지구로 유명하였다. 곳곳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몇 채의 한옥들은 이때의 명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여러 채의 한옥이 지붕처마를 잇대고 벽과 벽을 이웃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풍경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따뜻한 정과 살아갈 맛을 느끼게 해준다. 북촌 지역을 걷다보면 이어진 처마선의 아름다운만큼이나 골목길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북촌한옥마을이 지속가능한 관광지가 될 수 있도록 침묵관광을 하도록 주의를 요한다.

* 허용시간 : 10:00 ~17:00(주중,토) / 일 : 골목길 쉬는 날
* 대상지역 : 북촌로 11길 일대 약 100m 구간

※ 침묵관광이란 외부 관광객들의 관광지 방문으로 인해 주민들의 생활권과 환경권이 침해받지 않도록 큰 소리로 떠들지 않고 조용히 여행하는 관광형태를 말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

41591     2019-02-15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소금산길 26

※ 3월부터 설날,추석 당일, 매월 첫째,셋째 주 월요일 휴장

간현관광지는 원주에서 서쪽으로 17km 떨어진 섬강과 삼산천 강물이 합수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검푸른 강물 주변으로 넓은 백사장과 기암괴석, 울창한 고목이 조화를 이루고 강의 양안으로 40∼50m의 바위 절벽이 병풍처럼 관광지를 감싸고 있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송강(松江) 정철(鄭澈)이 “한수(漢水)를 돌아드니 섬강(蟾江)이 어디메뇨, 치악(雉岳)은 여기로다”라고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그 절경을 예찬하였듯이 섬강의 푸른 강물과 넓은 백사장, 삼산천 계곡의 맑은 물에 기암, 준봉이 병풍처럼 그림자를 띄우고 있어 더욱 운치를 더하고 있다.

화암사(완주)

화암사(완주)

23261     2019-02-15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화암사길 271

신라 효소왕 3년(694년)에 일교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설총도 한때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전한다. 극락전은 1425년 성달생의 시주로 건립됐으며, 중국 남조시대에 유행했던 하앙식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이다. 우화루 또한 고대 건축 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건물로 보물 제 662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해군 때 만들어진 동종은 호영이 주조한 것으로 절이나 나라에 불행한 일이 일을 때에는 스스로 소리를 내어 위급함을 알려주었다고하여 자명종이라고 부른다. 화암사는 불명산의 원시림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어 문화유산 답사와 휴식을 겸할 수 있는 운치있는 곳이다.

* 주요문화재 : 화암사 우화루 (보물 제662호), 화암사 극락전 (보물 제663호), 화암사 동종 (지방유형문화재 제40호), 화암사 중창비 (지방유형무화재 제94호)

대승서원

1497     2019-02-15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원상리길 84-7

본래 구이면(九耳面) 학천리에 건립하였는데, 나중에 훼철된 뒤 1926년 현재 위치에 다시 세웠다. 사당인 대승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고 강당은 정면 5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봉강서원

2233     2019-02-15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봉강구만길 29

1754년(영조 3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방간(李芳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완주군 용진면 모란리에 모란서원(牡丹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52년(철종 3)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우고 봉강서원이라 개칭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되었으나, 1899년 유림과 후손에 의하여 복원되어 이헌구(李憲球)를 추가배향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 내신문(內神門), 4칸의 강당, 대문 등이 있다. 사우에는 이방간과 이헌구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강당은 서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을 강론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매년 2월 중정(中丁 : 두 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유물로는『전북원우록(全北院宇錄)』1책 등 30여권의 문헌이 있으며, 재산으로는 대지 300여 평과 전답 1,000여 평 등이 있다.

화암사 우화루

18337     2019-02-15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화암사길 271

* 비가 꽃처럼 내리는 곳 *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가천리 화암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전으로 화암사 극락전 앞에 있다. 보물 제6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유재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3년(1611)에 새로 세웠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1981년 보수할 때 나온 상량문에는, 성달생(成達生)이 중창한 이래 1711년(숙종 37)까지 여섯 차례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건축양식에 있어서 극락전과 비슷한 점을 보이고 있어 조선시대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맞배지붕건물이다. 같은 경내에 있는 극락전과 내정을 사이에 두고 남북축선상에 놓여 있으며, 사찰 전방에 일반적으로 놓이는 누각건물 형식의 건물이다.

* 아름다운 당초문 장식의 조선 중기 건물 *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가천리 화암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전으로 화암사 극락전 앞에 있다. 보물 제6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유재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3년(1611)에 새로 세웠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1981년 보수할 때 나온 상량문에는, 성달생(成達生)이 중창한 이래 1711년(숙종 37)까지 여섯 차례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건축양식에 있어서 극락전과 비슷한 점을 보이고 있어 조선시대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맞배지붕건물이다. 같은 경내에 있는 극락전과 내정을 사이에 두고 남북축선상에 놓여 있으며, 사찰 전방에 일반적으로 놓이는 누각건물 형식의 건물이다.

수만리마애석불

15813     2019-02-15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전라북도 완주군 동산면 수만리에 있는 신라 말 고려 초의 불상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었다. 거대한 크기에 비해 하체로 내려갈수록 모델링이 약화되고 옷 주름도 모두 선 조화된 평면적인 마애불로 현재 하반신은 마멸되었다. 비만화된 방형의 얼굴은 눈을 지긋이 내려 감고 두툼한 코에 입을 꽉 다물어 침잠한 표정을 지었으며, 머리는 민머리에 낮은 육계가 솟아 있다. 활처럼 흰 양 귀는 내부 굴곡까지 정교하게 표현하였으며, 짧은 목에는 2줄 선으로 삼도를 선각하였다.

* 균형감이 있으며 박진감이 느껴지는 *

신체는 수평적인 건장한 어깨와 비만한 상체로 장대한 느낌은 주지만 몸의 굴곡이 없고 옷주름은 힘이 빠져 전체적으로 생동감을 찾을 수 없다. 법의(法衣)는 통견이며 U자형으로 길게 트여진 가슴의 목깃 사이로 내의(內衣) 자락을 비스듬히 새겼으며, 옷주름은 통일신라 후기부터 유행했던 평행 밀집식이어서 도식적인 느낌을 준다. 오른쪽 소맷자락은 복부의 옷깃 사이로 여며 넣었다. 왼손은 손등을 밖으로 향한 채 복부에 대었으며,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려 촉지인(觸地印)을 맺었다. 가부좌한 하체는 마멸되어 불분명하다.

*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에 이르는 거불 조성의 추세 반영 *

불상의 바깥 면에는 옷 주름 표현과 동일한 형태의 평행선으로 불꽃무늬를 선각하였으며, 머리 위에는 방형의 홈이 패어져 있어 원래 목조 가구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양감 있는 얼굴에 비해 평면화된 신체 조형, 침잠한 얼굴 표정, 힘이 빠져 느슨해진 평행 층단식 옷 주름 등,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에 이르는 거불 조성의 추세를 따른 대형 마애불이다. 거구의 불상이면서도 머리와 상체의 두드러진 양감 표현은 균형감이 있으며 박진감이 느껴진다.

추수경장군묘역

17509     2019-02-15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추동안길 14-7

* 명나라 장수의 조선 사랑 *

1998년 1월 9일 전라북도기념물 제9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의 무신인 세심당(洗心堂) 추수경(1530∼1600) 장군은 선조 24년(1591) 명나라의 무강자사가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의 신종에게 청원하여 이여송의 원군을 출병케 하였고, 자신도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총병아장으로 다섯 아들과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함께 참전하였다. 1593년 2월 곽산 대첩을 시작으로 평양성 탈환, 개성ㆍ한양 수복작전에 참여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 추동마을과 추수경 장군 *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남원 전투에 참전하였고, 전주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으나 전주사고(全州史庫)를 끝까지 지켰다. 명나라 군사들의 환국(還國)시 조상(祖上)의 나라에 남기로 하고 전투에 참가한 5명의 아들과 함께 완주군 봉동읍 추동(秋洞)에 남았다가 여생을 마쳤다. 추동이라는 마을 이름도 추수경 장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죽은 뒤에 충장공(忠壯公)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호성공신·완산부원군으로 봉하였다. 무덤 앞에 있는 비는 1973년에 새로 세운 것인데, 원래의 비는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제각으로 썼던 [봉양제]라는 건물은 다 허물어지고 지금은 그 터에 주춧돌과 정문만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추수경(1529∼1600년)의 묘역이다. 일제강점기에 묘역이 훼손되었으나 후손들이 복원했다. 2004년 완주군에서 신도비와 사당 봉양사를 세웠다. 묘와 상석, 문인석 한 쌍 등이 있다.

대원사(완주)

22100     2019-02-15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길 243

* 대원사의 목각사자상 예술적 가치 높아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모악산 동쪽 기슭 해발 420m에 자리 잡고 있는 조그마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 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고구려에서 백제로 귀화한 열반종의 개산조인 보덕(普德)의 제자 일승(一乘)·심정(心正)·대원(大原) 등이 670년(신라 문무왕 10) 창건하였으며, 1866년(고종 23)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원통보전·응향각·삼성각·봉익루·범종각·구요사·객실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고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협시하는 삼존불이 있으며 불상 뒷면에 후불탱화(後佛幀畵)·나한탱화(羅漢幀畵)가 있으며 삼존불상 앞에는 진묵대사가 만든 높이 90cm, 길이 135cm의 목각사자상(木刻獅子像)이 있다. 스님들이 거처하는 방에는 진묵대사의 영정과 제왕탱화가 걸려있고 대웅전 앞뜰에는 높이 238cm의 고려시대 말기 작품인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용각 부도 *

대원사 주위에는 9기의 부도가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뛰어난 유물은 고려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용각(龍刻) 부도이다. 옥개석 가운데에 두 마리의 용이 뒤엉켜 여의주를 잡으려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높이 187cm의 탑 모양을 한 용각부도는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는 평을 듣고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대원사는 증산교(甑山敎)의 상제(上帝)인 강일순이 이곳에서 수행을 하다가 1901년 도를 이루었다[成道]고 하여 증산교의 성지로도 추앙되고 있기도 하다.

대원사 용각부도

16143     2019-02-15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길 243

* 유례가 없는 독특한 형식의 부도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대원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로 높이 187㎝.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 되어 있다. 이 부도는 지대석·탑신석·옥개석·상륜부 등을 갖추고 있다. 석종형부도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 탑신부에는 여러 조각들이 전면에 시문되어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와 같은 형식은 우리나라에서 그 유례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지대석은 타원형이며 약간 다듬었을 뿐 별 조식이 없다. 가운데 부분이 불룩한 석종형의 탑신에는 문양이 전체에 걸쳐 깊게 부조되었는데, 크게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의 하단부에는 복엽(複葉) 18판의 앙련(仰蓮)이 아주 촘촘히 있다.

* 생동감 넘치는 용의 모습이 새겨진 부도 *

연꽃을 새긴 바닥돌 위에 배부른 원통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 중앙에는 두 마리의 거대한 용이 서로 휘어 감으면서 여의주를 빼앗으려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 부도을 ‘용각부도’라 하고 있다. 몸체를 형상화한 비늘이 아주 사실적이고, 용들이 꿈틀거려 조각은 생동감이 넘치는데, 탑신의 상단부에는 운문(雲文)이 넓게 조각되어 있고, 맨 아래에는 연꽃을 새겨 장식하였다. 탑신의 상하 양 끝에 양각의 띠를 두르고 있으며 옥개석은 8각이며 약간 파손되어 있다. 원형의 우동마루가 있고 그 사이에는 기와 골이 시문되었으며 처마가 아주 짧다. 상륜부에는 사각형의 노반(露盤) 위에 또 다른 사각형이 있는데 각 면에 홈이 파여 있다. 정상에는 보주가 올려져 있다.

* 왕사나 국사의 부도 *

이러한 형식의 부도 예가 없을 뿐만 아니라, 탑신에 당호나 조성기(造成記)가 없어 조성연대를 파악할 수 없으나 옥개석 형식을 볼 때 고려시대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탑신부의 조각기법으로 보아 왕사나 국사의 부도로 짐작된다. 대원사 경내에는 동북쪽 4기와 계곡에 6기 등 총 10기의 부도가 있는데, 이 용각부도는 동북쪽에 있는 4기 중 3번째에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