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안성객사

안성객사

21750     2020-11-25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종합운동장로 203

객사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 또는 객관이라 하는데, 사신이 내왕할때 묵던 숙소였는데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형태가 표준화 되어 전국에 360여개의 객사를 두었고 구조는 중앙에 정청을 중심으로 동익사와 서익사를 두었고 누각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안성의 객사는 고려시대 건축인 주심포 양식의 객사(客舍) 건물을 주건물 좌우에 붙어 뻗어나온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주되는 건물이 중앙에 있고 양옆으로 부속사가 있는 날개집으로 주건물인 중앙에 3間, 양쪽에 익실이 각 2間, 측면이 3間으로 이루어진 주심포양식의 배흘림이 약간 있는 건물로서, 수덕사 대웅전(1308년 국보 49호)과 강릉객사문(고려말 국보51호)과 같은 주심포양식을 띄고 있다고 밝혔다. 전형적인 객사의 외형을 하고 있는 이 건물의 지붕에서 「와장승인묘안 숭정후육십팔년 을해(瓦匠僧人妙案 崇禎後 六十八年乙亥)」 라는 명문 암막새가 발견돼 1635년, 즉 17세기초에 중수되었음이 밝혀져 이 건물의 축조연대는 14세기로 추정된다고 한다.

* 규모 - 정면 4칸, 측면 1칸
* 연대 - 조선시대
* 재질 - 통나무 / 기와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

27051     2020-11-25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길 66

이 한옥 민가는 안채와 사랑채를 붙여서 한채로 건립한 것으로 형태는 곱은자형에 1고주 5량집이다. 사랑채 뒤에는 2칸 사당이 있고, 본래의 사랑채는 없어졌다고 한다. 건립연대는 약 2백년전까지로 올라갈 수 있으나 그 동안 수차례에 걸쳐 전면적인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안채만이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본래 이 집은 중종 5년(1510)에 처음 세운 이후 정무공 오정방(1588~1634) 천파고오상에서 충정공 오두인(1624~1689)에 이르기까지 해주 오씨 명인들을 배출한 유서깊은 곳으로 전해내려온다. 특히 충정공은 이 집에서 성장하여 나라에 크게 공훈을 떨친 바 있어 우암 송시열이 편액을 써서 보내오기도 했다고 한다. 당초에는 덕봉리 252번지에 세워졌던 것이나 효종 1년(1650)에 현 위치로 이전해 왔다고하며 건물은 1935년에 중수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대지 740.49m²(224평)에 사당 18.57m²(5.62평), 안채 102.87m²(31.12평), 사랑 102.87m²(6.52평) 규모의 3동이 자리잡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치목수법, 건물의 배치 및 구성 수법이 우수하여 조선 중·후기의 주택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연대 - 조선시대 후기
* 규격 - 안채 102.9㎡, 사당 18.56㎡, 행랑 21.65㎡
* 재질 - 목재

* 오정방
1) 생몰년 - 1552(명종 7)∼1625(인조 3)
2) 본관 - 해주(海州) 오(吳)
3) 자호 - 영언(英彦), 퇴전당(退全堂)
4) 시호 - 정무(貞武)
5) 시대 - 조선 중기
6) 성격 - 무신1552(명종 7)∼1625(인조 3).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영언(英彦), 호는 퇴전당(退全堂)이다. 호군(護軍)을 지낸 오수천(吳壽千)의 아들이며 수군 우후(水軍虞候)를 지낸 숙부 오수억(吳壽億)에게 입양되었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안성 출신이다. 선조 16년(1583) 무과에 장원급제하자 이이(李珥)로부터 영재라는 칭찬을 받았다. 당시 북쪽에서 이탕개(泥湯介)가 종성지방을 자주 침범하자 대사마(大司馬) 이일(李鎰)의 휘하에 들어가 종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로 영흥지방에서 의병 수천명과 힘을 합쳐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이어 부령 부사·정평 부사를 지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兼) 부총관(副摠管)·포도대장(捕盜大將) · 군기시 제조(軍器寺提調) · 서북 순변사(西北巡邊使) 등을 지냈으며, 1603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품되었다. 이듬해 전라도 병사가 되고, 이어 경상우도 병사 겸 진주 목사와 황해도 병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폐위를 적극 반대하다가 삭직당하였다. 인조 1년(1623) 인조반정 후 포도대장에 등용되었으며, 경상좌도 병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왕을 따라 공주에까지 호종하였다. 뒤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죽산향교

죽산향교

17524     2020-11-25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향교길 54-45

1533년(중종 28)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그 밖에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1972년에 원장(垣墻)을 신축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성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명륜당, 동재(東齋)·서재(西齋)·내삼문(內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양성향교

양성향교

17253     2020-11-25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교동길 33-4

조선 숙종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창건연대 및 자세한 연혁은 미상이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 명륜당·내삼문·외삼문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 향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온온사

온온사

19744     2020-11-25

경기도 과천시 관악산길 58

과천의 객사였던 온온사가 축조된 것은 조선 인조 27년(1649년)이었으나 현재의 ‘온온사’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은 정조 때였다. 정조대왕은 1790년 2월 11일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행 중에 과천 객사에 경숙하면서 “경치가 좋고 쉬어가기가 편한다”하여 객사 서헌에 ‘온온사’를, 객사동헌에 옛 과천의 별호인 ‘부림헌’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한 것을 계기로 온온사라 부르게 되었다.1980년 6월 2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된 온온사는 1986년 12월 2일 해체 복원되었다. 하지만 옛 온온사의 건물 형태를 알 수 없어 전남 승주군의 낙안객사를 본떠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로 팔작지붕 중앙에 맞배지붕을 얹어 놓은 형태로 복원했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23058     2020-11-25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창밀로 34

화왕산 서쪽 기슭의 목마산성 아래에 있는 송현동 고분군과는 현풍으로 통하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남쪽에 위치한 대형 고분군이다. 교동에는 왕릉이라고 불리는 대고분을 중심으로 주위에 대소 수십 기의 고분들이 모여 있었으나, 현재는 8기만이 남아 있고 그나마 봉토들의 파손이 심하다. 이 고분군은 1918년에서 1919년 사이 일본인에 의해 그 일부가 발굴조사되어 유물은 대부분 일본으로 옮겨가고 지금은 일부만 국내에 남아 있다. 당시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형 고분군은 횡구식(橫口式) 또는 횡혈식(橫穴式) 고분이었다고 한다.

출토 유물은 금봉관을 비롯하여 순금이식(純金耳飾) 등 각종 귀금속으로 된 장신구와 동, 철제의 무구, 토기 등 대량의 유물이 출토 되었다고 한다. 일본인이 남긴 발굴 보고서가 간단하여 교동고분군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 등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현존하는 고분 중 21기(基)는 지금까지 복원한 것인데 그중 1기는 입구 쪽을 개봉했다. 구조는 현실(玄室)과 연도는 구별이 없고 다만 장방형(長方形)이 평면횡혈식(平面橫穴式) 석실로 삼면의 측벽은 크고 작은 돌덩이이고 판석(板石)으로 천장을 덮은 것이다. 일본인에 의해 개략적인 보고서가 출판되기는 하였으나 그 많은 유물들의 출토 경위와 유구(遺構)들의 특징이 자세하게 밝혀지지 못한 것이 아쉬운 점이다.

창녕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진한의 12개 나라 중 하나인 불사국으로, 비사벌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송현동 무덤들은 크게 2개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1지역은 목마산 기슭에서 서쪽으로 80여기의 무덤이 있던 큰 무덤들이었으나, 지금은 16기 정도만이 남아 있다.2지역은 송현동석불이 있는 부근에 20여 기 정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논으로 변하여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무덤은 겨우 몇 기 정도이다. 근처의 교동 무덤들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무덤의 구조와 유물의 성격이 거의 같다고 여겨진다. 교동무덤과 함께 1918년에 발굴되어 많은 양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유물 중 일부는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것도 있다고 한다.

신창리삼층석탑

16353     2020-11-25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신창리

이 석탑은 봉국사지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2층 탑신부 이상이 붕괴되어 주변에 방치된 상태이나 부분 재료는 양호한 편이다. 1·2층 탑돌몸(옥신:屋身)에는 양 모서리 기둥(양우주:兩隅株)이 조각되어있고, 1층 탑신 윗 쪽에 원형사리공(舍利孔)이 있으며, 하층기단 갑석은 4개의 판석으로 조성되었으며, 지붕돌(옥개석:玉蓋石)은 모두 4단 옥석받침이 만들어졌고, 옥신의 괴임대는 2단으로 되어있으며,남향 한 정면은 쓰러져있고,상륜부(相輪部)가 없으나, 기단부에서 상층부까지는 완벽하게 원형을 갖추고 있으며 옥신이나 옥새석의 주각수법이나 그 형식으로 보아 고려후기의 석탑으로 추정되며, 석탑의 높이는 218cm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 시대 - 고려시대
* 규격 - 높이 218cm, 기단부 148×148cm 1층, 옥신 76×76, 2층 옥신 26×26cm
* 재질 - 화강암

안성죽산리당간지주

17827     2020-11-25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당간지주는 부처와 보살의 공덕과 위신을 기리는 장엄용 불교 용구인 당(일종의 깃발)을 달기 위한 당간(幢竿)을 고정해 주는 두 개의 지주대를 말한다. 주로 절의 입구에 세워져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는 돌이나 철로 만든 것이지만 예전에는 목재를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당간지주는 보물 제435호로 지정된 5층 석탑 앞 약 30m 떨어진 앞에 위치하고 있다. 오래 전에 왼쪽의 당간지주가 밭 가운데 도괴되어 있었던 것을 1968년 5층 석탑 복원공사 때에 현재 위치에 바로 세웠다. 당간은 양지주가 동서향으로 대치해 있으며 아무런 조각이 없고 윗부분 안쪽에 구멍을 뚫어 간을 장치한 흔적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방치되어 지주 한쪽이 매몰되었던 탓인지 기반석도 찾아볼 수 없다. 대체로 이 당간지주는 둔중한 느낌을 주며 아무런 조식(調飾)도 없고 확실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초 봉업사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 연대 - 고려시대
* 규격 - 높이 4.7m, 가로 0.76m, 세로 0.5m
* 지정일 - 1979. 9. 3
* 재질 - 화강암

보광사(과천)

22964     2020-11-25

경기도 과천시 교육원로 41

보광사는 1929년 세워진 사찰로 목조여래좌상, 문원리 삼층석탑 등의 귀중한 문화재가 경내에 산재해 있으며 일반 사찰과는 달리 도심 속에 위치해 있는 점이 특이하다.

* 목조여래좌상

보광사 극락보전에 봉안된 목조여래좌상은 금칠이 되어있어 금불상처럼 보이지만 속이 나무로 만들어져 더욱 희소성을 지니며, 전체적으로 둥글어서 편안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제작연대에는 조선 중기로 추정된다.

* 문원리 삼층석탑

보광사 경내에서 만날 수 있는 수수한 느낌의 석탑으로 관문리의 옛 사지에 있던 것을 보광사로 옮겨온 것이다.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 문원리사지 석조보살입상

고려초기에 민간인에 의해 제작된 석조보살입상으로 높이가 2.4m에 달하는데도 권위나 위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자연석 돌기우에 눈과 코는 양각, 입은 음각으로 앞모습만을 간략하게 선으로 새겨 넣은 것이 특징이다.

금호재

19215     2020-11-25

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대동길 33

조선 중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금헌(琴軒) 이장곤(李長坤) 선생의 재사(齋舍)로 용흥사의 부속건물이다. 2차례에 걸쳐 옮겼는데 1966년에 현 장소로 이전했다. 용흥사가 1695년까지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적어도 17세기 후반의 건물로 여겨진다. 금호재의 형태는 팔작지붕의 집으로 목재는 느티나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연꽃 무늬의 공포(供包)와 망새(望瓦)에는 “병오년 9월 11일”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어 제작 연대를 추정케 한다. 금호재에서 북동쪽으로 1㎞ 정도 떨어진 야산 기슭에는 그의 묘소와 함께 창녕 대동리 금헌묘석상(昌寧大同里琴軒墓石像:경남유형문화재 296)이 있다.

* 조선 전기의 학자, 이장곤에 대하여 *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김굉필의 문인. 학문, 무예를 겸비한 인물로 중종의 신임을 받았다. 1495년(연산군 1) 장원으로 합격하고, 1502년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04년 교리(校理)로 있으면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거제로 귀양갔으나, 함흥으로 도주하여 양수척(楊水尺)의 무리에 섞여 살면서 목숨을 유지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박원종(朴元宗)의 추천으로 관직에 다시 임명되어 교리 ·장령(掌令)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학문과 무예를 겸비한 인물로 중종의 신임을 받았다. 1512년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이듬해에 이조참판이 되었다. 1519년 병조판서 재임시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주도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참여하였으나, 조광조(趙光祖) 등 사화에 연루된 사림들의 처형에는 반대하다가 삭직되었다. 문집에는 《금헌집》이 있다.

창녕 술정리 서삼층석탑

21411     2020-11-25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통일신라 석탑으로 2중기단 위에 세운 3층석탑이다. 높이 5.1m, 화강석으로 된 탑으로 1970년 6월 24일 보물 제520호로 지정되었다.상층기단(上層基壇)의 면석(面石) 중앙은 별도의 석재로 문비(門扉)가 새겨져 있으며, 위에는 양 우주(隅柱)가 조각되고 옥개(屋蓋) 받침은 5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옥개석 전각의 반전은 그리 심하지 않다. 상층기단의 각 면석의 조각은 곡선의 아름다운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상륜부에는 노반(露盤)과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기단은 8개의 면석으로 조립되고 탱주(撑柱)는 4매씩 되었으며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1매이다. 전체적인 조각기법으로 보아 술정리 동 3층석탑보다 수준이 떨어지며 제작 시대 역시 같은 통일신라시대지만 동 삼층석탑보다는 후대로 추정된다.

창녕 진양하씨 고택

21506     2020-11-25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시장1길 63

조선시대의 가옥으로 하병수의 17대 조상인 백연(白淵)이 건립하였다 전한다. 또한 상도리(上道里)에 건륭(乾隆) 25년이라 적힌 묵서(墨書)가 있어 1760년(영조 36)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의 가옥구조와 민가의 건축술을 알 수 있는 남향의 초가로 하씨(河氏)가 수대로 살아온 터이다.

가옥은 목조 초가로 일자형 홑집이다. 오른쪽 첫 칸이 부엌이고 안방, 대청, 건넌방이 차례로 각각 1칸씩인 4칸집으로 약간씩 변형되었다. 부엌 뒤로 반문을 내달아 창고를 만들었고, 남방집의 고상형(高床形) 대신 산곡간의 저상식(低床式) 집처럼 전퇴(前退)를 생략하였다. 마루판자는 윗면이 평면, 아래면은 원목 그대로이고 지붕은 쇠풀로써 덮었으며 못은 사용하지 않았다. 서까래는 구멍을 뚫어 그대로 이었고 지금 가옥의 부엌위치가 서쪽인 것에 반해 이곳은 동편으로 되어 있다. 서로부터 건넌방, 대청, 안방, 부엌순으로 되어 있고 부엌 뒤로 반문을 내달아 창고를 만들었고 지붕은 양토없이 밀대로 거꾸로 엮어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