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롯데월드 언더씨킹덤

롯데월드 언더씨킹덤

5225     2019-03-26

서울특별시 은평구 통일로 1050

서울 은평 뉴타운 롯데몰에 위치한 롯데월드 키즈파크는 약 6600㎡에 달하는 규모를 자랑하는 어린이 전용 놀이시설이다. 롯데월드 키즈파크는 '언더 씨 킹덤 (Under Sea Kingdom)'이라는 테마스토리에 맞춰 공간을 꾸며, 입장시에 마치 깊은 바닷속에 들어온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테마스토리에 맞춰 해저왕국의 평화를 지키는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다채로운 공연도 진행하고 있다. 또한 롯데월드 키즈파크에는 탑승형 놀이시설과 체험형 놀이시설이 고루 섞여있어 어린이들이 다양한 놀이시설을 즐길 수 있다.

롯데월드

롯데월드

69065     2019-03-26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 240

※ 19_20 한국관광 100선 ※

롯데그룹이 국민들의 여가 선용과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설립하고 운영하고 있는 테마파크이다. 롯데월드는 모험과 신비를 주제로 한 실내 주제공원인 롯데월드 어드벤처, 호수공원인 매직아일랜드, 쇼핑몰, 민속박물관, 아이스링크, 호텔, 백화점 등으로 구성되어 관광, 레저, 쇼핑, 문화를 한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대단위 복합생활공간이다. 롯데월드 어드벤처에서는 최첨단 탑승시설을 비롯하여, 환상적인 퍼레이드, 각종 영상 시스템, 레이져쇼, 공연, 각국의 음식을 연중무휴로 즐길 수 있다. 롯데월드 어드벤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실내 테마파크이다. 민속박물관에는 한국의 오천년 역사와 민속 문화가 역사전시관, 모형촌, 놀이마당, 저자거리로 나누어져 쉽고 재미있게 재현되어 있다. 롯데월드 가든스테이지는 롯데월드 공연의 중심무대로 각종 시즌 뮤지컬 쇼, 공개방송 등의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된다. 롯데월드 스타에비뉴는 한류스타 조성거리로 체험형 엔터테인먼트 시설이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8752     2019-03-26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81

※ 19_20 한국관광 100선 ※

* 끊임없이 새롭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곳

꿈꾸고(Dream), 만들고(Design), 누린다(Play)는 뜻을 가지고 있는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는 서울특별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위치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디자인 트렌드가 시작되고 문화가 교류하는 장소이며, 세계 최초 신제품과 패션 트렌드를 알리고, 새로운 전시를 통해 지식을 공유하며, 다양한 디자인 체험이 가능한 콘텐츠로 운영 된다. 전시, 패션쇼, 포럼, 컨퍼런스 등 국내외 주요 행사들을 진행하고 있으며, 건축물투어는 현장접수, 행사 일정, 키즈 프로그램 등은 사이트를 통해 확인하고 신청할 수 있다.

서울로 7017

서울로 7017

8802     2019-03-26

서울특별시 중구 한강대로 405

※ 19_20 한국관광 100선 ※

1970년에 준공되어 서울역 동부와 서부를 잇던서울역 고가도로는 당초 안전문제로 철거 위기에 놓였으나, 철거대신 지역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하여 고가도로를 재활용하는 <서울로7017가 추진되었고,고립되었던 서울역 일대를 연결하여 '보행길'로 재생하였다.'서울로7017' 이라는 이름은 '1970년에 만들어진 고가도로가 2017년에 다시 태어나고, 1970년대 차량길에서 17개의 사람길로 재탄생하는 1970년대에 만들어진 17m 높이의 고가'라는 의미를 모두 담은 이름이다. 이 이름대로 서울로 7017은 단절되어있던 도시를 연결하는 17개의 보행길을 갖추고 있어, 침체된 지역에 활력을 연결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서울로 7017에는 관광안내소 및 카페부터 목련무대, 달팽이극장, 장미무대,방방놀이터 등 다양한 체험시설과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쉬고 거닐며 즐길 수 있는 공간이자, 645개의 원형화분에 총 228종의 24,085주의 다양한 수목을 식재한 아름다운 공중정원으로 조성되어있다. 서울로 7017은 365일 24시간 개방되어있어 언제든지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하며, 사전에 서울관광 홈페이지를 통해 서울도보관광 프로그램을 예약하면 서울로 7017과 함께 서울역 일대의 다양한 역사문화유산과 관광명소를 서울문화관광해설사의 전문적인 해설을 들으며 탐방하는 체험도 이용할 수 있다.

경희궁 숭정전

경희궁 숭정전

22359     2019-03-26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숭정전은 원래 경희궁(慶熙宮)의 정전(正殿)이었다. 경희궁은 원래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元宗)의 사저(私邸)가 있던 곳이다. 광해군이 이곳에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풍수설을 믿고 왕기를 누르기 위해 즉위 9년인 1617년에서 1620년 사이에 궁궐을 건립하여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렀던 곳이다. 숭정전은 1910년 일제가 경희궁을 철폐하고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를 설립할 때도 남아 있었다. 그 후 1926년에 필동 남산 기슭, 지금의 동국대학교 자리인 조계사(曹溪寺)의 본전으로 사용되기 위해 이건되었다. 광복 후 그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세워지면서 1976년 9월 현재 위치로 옮겨져 학교의 법당인 정각원(正覺院)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희궁지 숭정전 일대는 서울특별시에 의하여 1985년과 1987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 되어 숭정전 월대와 계단을 비롯한 어도(御道)의 적심석(積心石), 그리고 좌우 행각지(行閣址), 숭정문지(崇政門址) 등이 확인되었다. 숭정전 주위에는 행각이 둘러져있었으며, 남쪽에는 숭정문(崇政門), 동남쪽에 건명문(建明門), 동쪽에 여춘문(麗春門), 서쪽에 의추문(宜秋門) 등이 있었다. 뒤로는 자정문(資政門)을 지나 편전(便殿)인 자정전(資政殿)이 자리잡고 있었다. 숭정전은 1980년대 말 경희궁을 복원ㆍ정비하면서 동국대학교에서 원래의 자리로 이건할 것을 검토했었다.

그러나 동국대학교의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고, 또 부재들이 낡아서 손상될 것을 우려하여 원래의 숭정전은 동국대학교 구내에 그대로 남겨두고, 경희궁지에 새로 숭정전을 복원하였다. 동국대학교에 있는 숭정전은 원래 이중(二重) 월대 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둥은 내·외진(內外陣)으로 배열되었으며, 내부의 어좌(御座)는 없어졌고, 불단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4면에는 꽃살분합문을 달았고, 그 위에는 교창(交窓)을 내었는데, 어칸에는 4짝, 그 옆 협칸에는 3짝, 그리고 가장 양 끝칸인 툇간에는 2짝문으로 나 있다. 내부 천장은 소란반자이고, 바닥은 난방시설을 하였다. 공포는 외부로는 창방 위에 외2출목의 쇠서와 교두형 첨차를 두어 다포계의 특징을 보이면서 기둥 위에만 짜여 있다. 간포(間包) 대신 화반을 두고, 공포 내부에 출목 없이 양봉형(樑奉形)으로 보아지를 마련하여 보를 받치는 점은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내부 천장은 우물반자를 꾸며 화려한 용(龍)무늬 단청을 그렸다. 건물 앞에 놓인 계단 역시 다른 궁(宮)의 정전과 같이 삼도(三道)로 꾸며 중앙에는 봉황 1쌍을 양각하여 장식했다. 팔작지붕의 용마루에는 양성을 했고 양 끝에 취두를, 내림마루 끝에는 용두를, 추녀마루에는 잡상들을 얹어, 이 건물이 이전에 궁궐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75년 12월 27일부터 1976년 9월 15일까지 해체 복원공사를 하였다. 일본인들이 강제로 철거하여 팔아 넘긴 탓으로 원형이 크게 파손되었고, 교실·체육관 등으로 사용되면서 많이 변형되었다. 현재는 불교 의례를 행하기에 알맞도록 내부가 변경되어 있다.

경희궁 흥화문

경희궁 흥화문

20064     2019-03-26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 19_20 한국관광 100선 ※

조선 광해군8년(1616)에 세운 경희궁의 정문으로, 경희궁은 처음에는 경덕궁이라하였는데 경복궁을 북궐이라하고 창덕궁을 동궐이라하듯이 이를 서궐이라 하였다. 본래는 인조의 생부 원종의 잠저가 있던 곳으로 광해군이 왕가를 없애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한다. 일제 때인 1910년 경희궁을 헐고 경성중학교(서울 중고등학교)를 건립하였다. 이때 이 문은 남아 있다가 1932년 박문사에 이전되어 정문으로 삼았는데 박문사는 안중근의사의 손에 죽은 침략자 일본인 이등박문의 사당이었으나 현재 신라 호텔이 이 자리에 들어서게 되어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었었다. 1986년 서울시에 의하여 공원으로 개방되었다.

모항갯벌체험장

모항갯벌체험장

96     2019-03-26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모항길 107
063-584-7788

조개캐기, 진흙놀이 등을 통하여 갯벌에 대한 호기심과 자연생태에 대한이해를 높일 수 있는 가족휴양 및 생태체험 학습관광지이다.

경희궁

경희궁

96317     2019-03-26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 19_20 한국관광 100선 ※

사적 제271호인 경희궁은 새문안 대궐 또는 서쪽의 궁궐이라 해서 서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후 왕족의 사저로 쓰이다가 광해군 8년(1616)에 이 새문안 대궐 자리에 왕기(王氣)가 있어 이를 눌러 없애기 위해 별궁을 짓고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축출되었으며 영조 36년(1760)에는 궁의 이름을 경희궁이라 개칭하였다. 경희궁에는 회상전, 흥정당, 집경당, 숭정전, 흥화문 등의 건축물이 있었으나, 순조 29년(1829)에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되어 1831년에 중건하였다. 국권침탈 뒤에 건물은 없어지고 그 터에 경성중학교(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세워졌으며 1987년 서울고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뒤 공원으로 가꾸었다. 공원 내에는 서울시립미술관, 산책길 등이 있고 신라호텔로 옮겼던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 다시 제자리에 옮겨졌으며, 정전인 숭정전의 복원작업이 1994년 11월에 완료되었다.

창경궁

창경궁

59633     2019-03-26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19_20 한국관광 100선 ※

창경궁은 세종대왕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고자 1418년에 지은 수강궁이 그 전신이다. 이후 성종 임금 대로 와서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을 짓고 창경궁이라 명명했다.창경궁에는 아픈 사연이 많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적이 있고 이괄의 난이나 병자호란 때에도 화를 입었다. 숙종 때의 인현왕후와 장희빈, 영조 때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이야기 등이 창경궁 뜰에 묻혀있다. 사적 제 123호인 창경궁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하여 창경원이라 격하되고 동물원으로 탈바꿈 했었으나, 일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한 온 겨레의 노력으로 1987년부터 그 옛날 본래 궁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홍화문, 명정전(조선 왕조의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임), 통명전, 양화당, 춘당지 등이 있으며 구름다리를 통하여 종묘와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다.

* 주요 문화재 - 홍화문(보물 제 384호), 명정문(보물 제 385호), 명정전(국보 제 226호), 통명전(보물 제 818호), 옥천교(보물 제 386호)

[창경궁 홍화문 - 보물 제384호(1963년 1월 21일 지정)]
혜화문은 도성의 동북쪽에 위치한 도성 4소문 중의 하나로서 태조 5년(1396) 9월 도성의 창축과 함께 건설되었는데 이 때의 문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 그러나 성종 14년(1483)에 세운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문이라고 명명하였으므로 창경궁의 동문이름과 같은것을 피하기 위하여 중종 6년(1511)에 홍화문을 혜화문이라고 개칭하였다. 창경궁은 원래 수강궁이 있었던 곳으로, 1418년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위해 고쳐지었다. 그러다가 성종조에 대왕대비와 대비를 모시기에 부족한 궁궐을 보충하기 위해 수강궁터에 새로이 창경궁을 창건하였다. 창경궁은 서울의 다른 궁궐과 같이 임진왜란 때 불탔으나, 광해군이 주요 건물들을 중창하였다. 창경궁의 명정전과 명전문 그리고 홍화문이 그 때 중창된 건물들로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창경궁은 그 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파괴되어 궁궐로써의 면모를 많이 잃었다. 1909년 창경궁은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원하면서 많은 전각들이 헐려 버렸고, 1911년에는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바뀌었다. 해방 후에도 창경원으로 계속 존속해 오다가 1984년부터 복원을 통해 비로소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홍화(弘化)'의 뜻은 교화, 덕화를 널리한다는 뜻으로 창경궁의 다른 전각들의 이름과 함께 서거정이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으로 꾸몄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한층 더 돋구고 있다. 여러차례의 수리와 단청으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었지만, 창경궁·창덕궁 같은 건물과 함께 17세기 초반 목조건축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창경궁 관천대 - 보물 제851호(1985.08.09 지정)]
서울에는 현재 조선시대에 만든 2개의 관천대가 있다. 하나는 창경궁 안에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작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옛 북부 관상감 자리인 전 휘문고등학교 교지에 있는 것인데, 두 관천대는 구조나 크기, 제작 방법이 거의 같다. 창경궁 안에 있는 이 천문 관측소는『서운관지(書雲觀志)』에 의하면 조선 숙종 14년(1688)에 만들어졌다. 높이 3m, 가로 2.9, 세로 2.3m 정도의 화강암 석대(石臺) 위에 조선시대 기본적인 천체관측 기기의 하나인 간의를 설치하고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간의는 없고 석대만 남아 있는데, 당시에는 관측소를 소간의대, 또는 첨성대라고도 불렀다. 관상감의 관원들은 이 관측대에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끊임없이 관측하였다. 17세기의 천문 관측대로서는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귀중하며, 관상감에 세워졌던 조선 초기의 또 하나의 관천대와 함께 조선시대 천문대 양식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창경궁 풍기대]
창경궁에 있으며 조선 후기(18세기)에 제작되었다.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크기는 높이225cm, 하부 대석 높이 91cm, 넓이 62cm×62cm, 상부 팔각주 높이 135cm, 경 43cm이다. 「또 대궐 가운데에는 풍기가 있는데 이는 곧 옛부터 바람을 점치려는 뜻으로서, 창덕궁의 통제문 안과 경희궁의 서화문 안에 돌을 설치하고, 거기에 풍기죽(風旗竹)을 꽂아 놓았었다.」 화강석을 다듬어 만든 풍기대에는 아래에 상을 조각한 대를 놓고 그 위에 구름 무늬를 양각한 팔각주를 세운 모양으로 되어 있다. 팔각주의 맨 위의 중앙에는 깃대를 꽂는 구멍(직경 4.5cm)이 있고 그 아래 기둥 옆으로 배수 구멍이 뚫려 있다. 깃대의 길이는 확실치 않고, 깃대 끝에 좁고 긴 깃발을 매어 그것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잴 수 있었다.

풍향기의 구조와 모양은〈동궐도(東闕圖)〉의 그림으로 알 수 있다. 이 풍기대들은 창덕궁과 경희궁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측우기와 수표가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기인데 대해 풍기는 바람의 방향과 강도를 측정하는 풍향계이다. 풍향의 측정은 농업 기상학에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관측 자료이다. 풍기에 의한 풍향의 관측은 아마도 세종 때부터는 제도화되었으리라고 생각되고, 수표의 경우와 같이 처음에는 풍기대를 절의 당간지주석처럼 만들었으리라고 추측된다. 풍향은 방향으로 측정되어 24향으로써 표시되었다. 또 풍속은 그 강도에 따라 몇 단계로 구분되었는데 아마도 강우량의 경우처럼 8단계 정도로 분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나무가 뽑힐 정도의 바람은 대풍이라 불렀고,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아갈 정도의 바람은 가장 강한 것으로 폭풍이라고 하고, 대풍과 폭풍은 풍이(風異)로서 특히 기록되었다. 풍기대는 지금은 없어지고 그림으로만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풍향계대로서 그 유용한 관측기의 실증적 유물로 기상 관측기의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창경궁 명정전 - 국보 제226호(1985.01.08 지정)]
창경궁(昌慶宮)의 정전(正殿)으로 정면 5칸 60.4척, 측면 3칸 32.28척에 단층 팔작지붕에공포(慊包)는 다포(多包) 형식을 취하고 있다.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후면에 따로 지은 툇간(退間)이 부속되어 있다. 기단(基壇)은 이중기단으로 이 기단은 지세에 따라 3면에 적석(積石)을 한 것으로 전면의 중앙과 북쪽 중앙에 화강석의 계단이 시설되어 있다. 계단 중앙에는 쌍봉(雙鳳)을 부각(浮刻)하였으며 기단은 장대석(長臺石)을 쌓았���며, 난간은 설치하지 않았다. 건물은 이중기단 위에 다시 장대석으로 한층 돋음한 지면에 세워졌는데 초석은 원형이다. 축부(軸部)는 16개의 평주(平柱)와 4개의 고주(高柱)로 형성되어 있고 고주는 전(殿)의 전면에만 배치되어 전면이 툇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정면의 중앙 3칸은 분합문이 설치되어 있고 좌우 툇간은 하단에 적벽돌이 약 12층 쌓여 있다. 공포(慊包)는 내4출목, 외3출목 포작(包作)을 평방(平枋) 위에 밀조(密組)하였다.

제공(提慊)의 쇠서는 수설(垂舌), 첨차(쿊遮) 뒷몸은 행공첨차 끝처럼 직절(直絶), 바닥을 굴리고 그 부분을 초각(草刻)하여 장혀몸을 따라 도리에까지 솟구치게 하였고 보 아래에는 첨차가 모두 한몸으로 모두어져 당초각(唐草刻)된 양봉이 되었다. 출목(出目) 사이에는 순각천장을 만들었다. 공포의 짜임새는 대단히 견실하고 쇠서의 곡선은 경직하며 초각 솜씨도 힘차고 긴장미가 있어 조선 초기의 수법을 발견할 수 있다.가구(架構)는 대량(大樑)이 고주와 뒷면 평주(平柱) 공포 위에 걸리고 그 위에 종량(宗樑)과 대공(臺工)이 종도리를 받고 있으나 이 부분에 잡다한 보강재(補强財)가 혼입되어 있어 종도리와 중도리 사이가 빈 공간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대량 윗몸에 따라 우물천장이 가설되어 내부에서 보이지는 않는다. 처마는겹처마로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마루에는 취두(鷲頭), 합각마루 끝에는 용을 새기고 추녀마루에 잡상(雜像)을 두었다. 이 건물에서는 주간 문비(門扉)와 광창(光窓)의 구성이 광해조의 재건 당시의 것으로 근정전(勤政殿) · 인정전(仁政殿) 등과 같은 모양을 하여 타 궁전 문비의 모범이 된다고 한다.

[창경궁 대온실 - 등록문화재 제83호(2004.02.06 지정)]
대한제국 순종 융희3년(1909)에 준공한 온실로써, 건축 당시 한국 최대의 목조구조의 온실이었으며, 진열식물은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 등을 전시하였다. 1986년 창경궁 정비 중창공사를 계기로 우리나라 자생난을 중심으로 세계의 각종난을 진열하고 있으나 앞으로 국내 자생식물 단일온실로 특성화할 계획이다.

창경궁 홍화문

창경궁 홍화문

20134     2019-03-26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19_20 한국관광 100선 ※

창경궁(昌慶宮)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중층(重層) 우진각지붕으로 다포식(多包式)이다. 장대석(長臺石)의 석조기단 위에 원형 초석을 두었으며 문루(門樓) 하층은 양개(兩開)의 판문(板門)이 설치되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고 상층은 판상(板床)의 누(樓)가 설치되었다. 상층의 누는 사면 벽의 판문을 열면 사방을 관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상하층의 공포(慊包)는 내3출목, 외2출목으로 명정전(明政殿)의 공포 형식과 유사하다. 다만 첨차 뒷몸이 모두어져 한몸이 되어 만들어진 양봉이 대량(大樑)을 깊숙이 받아 그 끝이 고주(高柱)의 그것과 맞닿을 정도로 발달된 점이 다르다. 가구(架構)는 고주가 상하층에 걸쳐 세워지고 하층보와 상층보가 여기에 결구(結構)되어 있다. 하층의 대량 상부에는 우물천장이 설치되었고 상층의 대량 이상은 노출하여 연등천장이 되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마루에는 취두(鷲頭) 합각마루 끝과 추녀마루에는 각각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을 놓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광화문광장

광화문광장

44101     2019-03-26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72

2009년 8월 1일,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여 시민들에게 개방된 광화문 광장은 600년 역사를 지닌 서울의 중심거리 세종로를 차량 중심의 거리에서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전환하고, 경복궁과 북악산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하여, 세종로의 옛 모습인 육조거리 복원을 통한 역사·문화 체험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서울시 종로구 광화문에서 세종로 사거리와 청계광장으로 이어지는 세종로 중앙에 길이 550m, 너비 34m로 조성되었으며,'광화문의 역사를 회복하는 광장' '육조거리의 풍경을 재현하는 광장', '한국의 대표 광장', '시민들이 참여하는 도시문화 광장', '도심 속의 광장', '청계천 연결부' 등으로 구성되었다. 초입 구간인 '광화문의 역사를 회복하는 광장'에는 월대를 재현하고, 해태상을복원하였으며, 세종로공원 주변 구간인 '육조거리의 풍경을 재현하는 광장'에는 과거 한양의 중심거리였던 육조거리의 흔적을 재현하고 이를 형상화한 축소모형도 설치하였다.

세종문화회관 앞에 자리하는 '한국의 대표광장'에는 세종대왕동상을 이전하고 분수를 이용한 워터스크린을 통하여 한글을 형상화하여 보여준다.세종문화회관과 이순신장군동상 사이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도시문화 광장'에는 이용객을 위한 편의시설과 전시장, 엘리베이터, 만남과 약속의 장소 등 문화갤러리 등이 들어선 상태이다. 이순신장군동상 주변에 조성된 '도심 속의 광장'에는 세종로의 상징이자 도시경관축의 중심지로서 상징성을 나타내고 연못과 바닥분수 등 수경시설을 설치해 놓았다. 세종로사거리와 청계광장 사이의'청계천 연결부'는 청계천과 경복궁을 연결하는 보행 네트워크의 연결축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밖에 지하철 경복궁역과 광화문역에서 발생하는 지하 용출수를 청계천으로 흘려보내는 '메모리얼 수로'와 이순신장군동상 뒤편에 지상과 광화문역을 연결하여 시민들이 쉽게 광장을 오갈 수 있도록 '썬큰광장'을 조성해 놓았다.

* 규모 : 19,000㎡ (폭 34m, 길이 550m)

광화문

광화문

113857     2019-03-26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19_20 한국관광 100선 ※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며, 궁성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국왕이 드나드는 정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었기 때문에 다른 궁궐의 정문에 비해 그 규모와 격식 면에서도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 또한 광화문은 담장 끝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두어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형식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에 세 개의 홍예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도록 하였다.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때를 알리는 데 사용하였다. 이처럼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법궁이라는 점은 광화문을 비롯한 성문의 형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궁의 문들은 낮은 단 위에 문을 세우지만 경복궁의 문은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중앙에 홍예문을 내서 마치 성곽의 문과 같은 모습을 취한다. 광화문은 그 중에서도 홍예문을 셋이나 내서 가장 격식 높은 모습을 보여준다. 광화문이 법궁의 정문이라는 사실을 잘 드러내준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이 궁제에 따라 '오문(午門)'으로 부르다가, 태조 3년(1395) 정도전에 의해 '정문(正門)'으로 이름을 바꾸지만, 세종 8년(1426)에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집현전에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을 지어 올리면서 지금의 광화문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원래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궁성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부서지고 석축은 탄흔 투성이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광화문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된 것은 1968년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다. 파괴된 문루를 다시 짓고 광화문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그러나 새로 재건한 광화문은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졌으며, 재건 당시 광화문의 축을 경복궁의 중심축에 맞춘 것이 아니라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청사의 축에 맞추어, 그 결과 3.5도 가량 본래의 축과 어긋나게 틀어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원래의 광화문 자리에서도 14.5미터 가량 뒤로 물러나 지금의 자리에 서있게 되었다. 이렇게 원형을 잃어버린 광화문을 복원하고자 2006년부터 광화문 철거작업을 시작해 3년 8개월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2010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화강암으로 육중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이층의 문루를 얹어 멀리 조망하기 좋을 뿐 아니라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기단에 있는 3개의 아치형 출입문은 경복궁이 조선의 정궁이라는 위엄을 과시한다. 돌로 만든 기단 위에는 흙을 구워 벽돌처럼 만든 '전돌'로 나지막한 담을 둘렀는데, 여기를 장식한 팔괘문양은 조선조 궁궐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