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영동향교

영동향교

18191     2020-04-02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성안길 20-9

조선 선조 때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60년(현종 1)에 성내(城內)로 이건, 복원하였다. 1676년(숙종 2)에 다시 구교리로 이전하였다가 1754년(영조 30)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과 6칸의 명륜당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이 향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소장전적은 판본이 몇 권 있을 뿐이다.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옥천 이지당

옥천 이지당

21600     2020-04-02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이백6길 126

체육과* 성리학자 조헌을 기리는 서당, 이지당 *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이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당으로 1977년 12월 6일 충북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중엽 옥천읍 옥각리에 사는 금(金), 이(李), 조(趙), 안(安)의 4문중이 합작해서 세운 서당이다. 당초에는 각신동(覺新洞)이라는 마을 앞에 있었으므로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후학을 가르쳤던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조헌(趙憲:1544~1592)의 친필로 된 ‘각신서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조헌은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도원(陶原) 또는 후율(後栗)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이의 문인 가운데서도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1,700여 명을 규합하여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승병(僧兵)과 함께 청주(淸州)를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후 금산싸움에서 700명의 의병과 함께 순국하였다.

* 이지당의 유래 *

각신서당은 후에 송시열(宋時烈)이 《시전(詩傳)》에 있는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 즉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 라는 뜻의 문구에서 끝의 ‘지(止)’자를 따서 이지당(二止堂)이라고 고쳐 불렀다.후 퇴락된 것을 1901년(광무 5) 이 서당을 세웠던 4문중에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 서당 건물은 목조 6칸의 강당과 누각으로 되어 있다.

봉유재

봉유재

15925     2020-04-02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내동1길 40-2

이 건물은 조선 중종때 안주목사를 지낸 박성량(朴成樑)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후손들이 인조 10년(1632년) 3월에 건립한 재실이다. 처음 이 건물이 세워졌을 때 현판도 달지 않고 그냥 소종재(小宗齋)라고 일컬었는데 이는 곧 대종재(大宗齋)인 흥학당 앞에 세워져서 이런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세대가 멀어지고 자손이 번창하자 "선조를 받들고 후손에 복을 준다(奉先裕后)"라는 뜻의 현판을 달고 봉유재라 했다 한다.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건물로 정면 2칸이 큰 대청마루를 이루고 있다.

※ 목사 : 지방의 각 목(牧)을 맡아 다스리던 정삼품 외직 문관

영동 화수루

영동 화수루

16590     2020-04-02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 하도대3안길 33-18

이 건물은 원래는 조선 중기인 명종 원년(1546)에 옥계서당으로 세웠던 것을 순조 4년(1804)에 고성남씨 수일파 문중에서 후손들에게 학문을 전수할 목적으로 현 위치에 옮겨짓고 이름도 바꾼 것이라고 한다. 정면2칸, 측면2칸의 간결한 누각식의 건물로, 전면 2칸은 우물 마루를 깐 누마루로 만들고 후면 2칸은 온돌방을 들였다.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건축양식에 따라 지은 것인데,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는 초익공의 간단한 공포를 짰으며 기둥 사이는 3구씩의 소로만을 끼웠다. 정면과 측면의 칸수를 같게 하고 사면에는 난간을 돌리었으며, 누마루를 두는 등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이용하던 누정건축의 특징이 잘 갖추어져 있다.

영동 한천정사

영동 한천정사

17437     2020-04-02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원촌동1길 48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 선생이 한천팔경(寒泉八景)이 있는 이곳에 잠시머물며 작은 정사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였는데 후에 한천서원(寒泉書院)을 짓고 우암을 제사하다 고종때(1868)에 철거된 후에 후학들이 다시 유림회를 결성 한천정사(寒泉精舍)를 건립하였으나 정확한 건립연대는 전해지지 않고 현재에 이른다. 한천정사(寒泉精舍)는 정면 3칸 측면 2칸(1칸반)의 목조한식팔작기와집으로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으로 방이 설치되어 있으며 전면으로는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건물은 자연석 주초위에 4모기둥을 세우고 도리집으로 하였다.주변에 막돌담장을 두르고 정면에 일각문이 있다. 기둥에는 한천팔경을 글로 새겨 주련을 하였다. 건축형식은 비교적 고식이 잘 유지되어 있는 건물로서 월유봉과 장교천이 선경(仙境)을 이루는 장소에 위치하며 우암 선생의 자취를 살필 수 있게 하는 곳으로 주변의 한천팔경과 양측에 온돌방과 중앙에 마루를 두어 글읽는 장소로서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 시대 : 조선시대

김해 봉황동 유적

김해 봉황동 유적

25202     2020-04-02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63번길 50

* 철기시대의 가야문화, 봉황동 유적 *

가야시대의 대표적인 조개무지로서 1920년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초로 발굴조사된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구 문화재자료 제87호)가 합쳐져 2001년 2월 5일 사적으로 확대 지정된 유적이다. 또한 구릉 위에는 황세장군과 여의낭자 전설에 관령된 여의각, 황세바위 등이 남아있으며, 가야시대 고상가옥, 주거지 등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철기시대 초기의 것으로, 높이가 7m, 동서의 길이 약 130m, 남북의 너비 약 30m의 낮은 언덕 위에 이루어져 있다. 구릉의 남쪽에는 회현동의 마을이 인접해 있고, 북동쪽 낭떠러지 밑에도 민가가 들어서 있어 패각층이 드러난 단면과 구릉 위에 흩어진 흰 조개껍데기를 볼 수 있다. 처음 알려진 것은 1907년이지만, 1920년에 있었던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비롯하여 그 뒤 몇 차례의 학술조사를 통하여 이 유적에 대한 문화적 성격과 연대의 개요가 밝혀져서, 한국 선사시대의 유적지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지이다. 일련의 발굴을 통하여, 이른바 김해토기(金海土器)라고 명명(命名)된 토기의 조각들이 가장 많고, 도끼와 손칼과 같은 철기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철기가 이미 일상생활의 도구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철기 이외에 골각제품(骨角製品)으로서도 골촉(骨鏃) ·골침(骨針) 등과 송곳 같은 찌르개류[尖頭類]가 함께 출토되었다. 김해토기는 종래의 민무늬토기보다 높은 온도로 구워서 만든 발달된 경질(硬質)의 토기로서, 그 특색은 문살무늬나 삿무늬 등의 타형(打形)무늬가 있다는 점이다. 타형무늬는 토기를 단단히 하기 위하여 무늬가 새겨진 방망이로 두드려서 생긴 것이다. 특히 후일에 와서 신라토기(新羅土器)의 모체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원시신라토기라고도 한다.

* 봉황동 유적의 가치*

1920년의 발굴 때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때의 돈인 화천(貨泉) 1개가 나와 이 패총의 상한연대(上限年代)가 밝혀졌고, 또 함께 발견된 탄화미(炭化米)는 한국의 벼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뒤 34 ·35년의 발굴을 통하여 한 무리의 돌널무덤과 그 옆의 독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한 개의 옹관에서 세형동검(細形銅劍)과 청동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남방식 고인돌[南方式支石墓]의 뚜껑돌로 보이는 한 개의 큰 돌이 현재에도 있다. 이 유적들 사이의 층위적 관계(層位的關係)는 아직도 연구할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안터선사공원

안터선사공원

18136     2020-04-02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안터1길 36

안터선사공원은 옥천의 선사시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안터선사공원에는 고인돌 1기, 선돌 1기가 있다. 석탄리 고인돌은 안터마을에 있던 3기의 고인돌 중 1977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안터1호 고인돌이다. 덮개돌이 거북 모양이며, 판돌 4매를 짜 맞춰 무덤방을 지상에 축조한 탁자식 고인돌이다. 발굴 당시 X 모양을 새긴 돌, 얼굴 모양의 예술품, 가락바퀴, 그물추 등이 출토되어 고인돌에 묻힌 이가 여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과 짝을 이루는 선돌은 아랫부분에 쪼으기 수법으로 지름 90cm의 원을 새겨 전체적으로 임신한 여성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안터1호 고인돌에 묻힌 사람을 나타내는 기념비적 기능과 무덤 수호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인돌과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옥천향교

옥천향교

3432     2020-04-02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향수8길 8-5

1398년(태조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임진왜란중에 소실되었다가 그뒤 중건되었다. 1954년에 유림총회에서 황폐한 향교 재건을 결의하고 1961년에 복원하였으며, 1966년과 1974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10철(十哲)·송조6현(宋朝六賢)의 위패가, 동무·서무에는 우 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경장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이 향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장도서는 판본 15종 58책, 사본 11종 26책이 있으며, 이 중 『유안(儒案)』·『청금록(靑襟錄)』·『청금속록(靑襟續錄)』·『선안(仙案)』·『교안(校案)』·『향교중수사실(鄕校重修事實)』 등은 조선 후기 향교연구와 이 고장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백련리도요지

19457     2020-04-02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사기아름길 80

백련(白蓮)리 새미골 도요지는 16.17세기 조선 자기의 본류인 분청, 상감, 철화백자를 굽던 곳으로 전통 막사발의 본고장이자 일본 국보 찻잔인 이도다완(井戶茶碗) 생산지로서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하얀 연꽃이 어우르진 이곳 백련리 도요지에서 투박하면서도 새의 붉은 혓바닥과 이슬을 머금은 듯한 독특한 문양으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눈박이 사발과 도공을 강탈해 가 자기네 국보로 둔갑시켜 숭앙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1974년 경상남도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어 옛도공의 후손들이 조선 막사발의 명성을 재현하고 있으며 2002년 국내영화사상 최초로 칸느 영화제 본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영화 취화선의 촬영장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하동군은 매년 5월 25일 차의 날을 전후해 이곳 백련리 도요지에서 도예(淘藝)와 백련지(白蓮池)를 주제로 찻 사발 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2004년부터 아름마을 조성사업을 추진하여 도예 체험과 연지 산책 등 농촌 테마형 문화체험이 가능하도록 각종 편의시설과 테마시설을 지속 확충 중에 있다.

거창 황산마을 옛 담장

29486     2020-04-02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1길 109-5

거창 황산마을은 18세기 중엽에 황고(黃皐) 신수이가 입향하면서 번성한 거창신씨 씨족마을로, 마을의 생성은 16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조선시대 영조 이후 인물이 연이어 배출되었다고 전해진다. 마을 어귀에는 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폭 5m 이상, 높이 15m 이상의 수령 600년에 달하는 고목이 자리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이 고목을 안정좌(安亭座)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은 대체로 평탄하며 마을 동측에 흐르는 호음천을 중심으로 큰땀과 동촌으로 구분되어 있다. 마을 내 주택들은 대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한말과 일제강점기 지방 반가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며 규모와 형식면에서 월등함을 보여주는 시도민속자료 제17호 ‘거창 황산마을 신씨고가’ 등의 지정문화재는 전통마을로서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마을 전체는 약 50여호로 거의 안채와 사랑채를 갖추고 있으며 이렇게 한 마을 전체가 모두 기와집으로 무리지어 있는 것은 이른바 씨족부농촌으로 소작마을을 별도로 두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담장은 대개 토석담으로 담 하부 2~3척 정도는 방형에 가까운 제법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진흙을 사춤하지 않고 대부분 메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이는 도로보다 높은 대지 내 우수(雨水)를 담 밖으로 자연스럽게 배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자연석으로 메쌓기 한 위에는 하부의 자연석보다 작은 20㎝ 내외의 돌을 담 안팎에 사용하여 진흙과 교대로 쌓아 올렸고 대부분 담장 상부에는 한식기와를 이었으며 또한 근년에 쌓은 담장은 기존 담장과 달리 엇쌓기를 하였다. 마을의 시한당 앞 연못은 일반적인 한국 전통의 연못양식인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이 아닌 원지방도형(圓池方島形)으로 구성되어 있어 독특하다. 전반적으로 전통고가와 어우러진 활처럼 휘어진 전통 담장길은 매우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 담장 - 토담길이 약 1,200m의 돌담, 하부가 돌담 구조인 토석담
* 마을형성 - 600년전 형성
* 문화재 - 거창 대정리 신씨고가(경상남도 민속자료 17호) 등 3건

거창 무릉리 정씨고가

16123     2020-04-02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3길 19-16

신수정은 숙종 12년(1686)에 장사랑을 지낸 산수정 정형초가 건립한 것으로 현재의 건물은 1924년에 중수한 것이다. 건물구성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 등으로 되어 있고, 안사랑채는 헐리고 일부 변경된 구조로 남아있다. 건물 배치는 경사지에 기단을 높게 축조하여 대지의 안쪽 높은 곳에 안채, 바깥쪽 낮은 곳에 사랑채를 배치하였다. 안채는 우리나라 남부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ㄷ자형’ 평면의 3량구조 맞배지붕의 홑처마이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一자형’ 평면에 양끝 협칸을 앞으로 돌출시켜 ‘ㄷ자형’ 평면을 만들고 있다. 사랑채는 익공계 3량 구조로 'ㄱ자형' 평면에 정면은 팔작지붕이고 측면은 맞배지붕으로 처리하였고, 앞으로 돌출된 대청은 누마루형식으로 하부는 개방되어 있고 상부는 대청의 외부에 마루를 두르고 계자난간(계자난간)을 설치하였다. 사랑채는 건물 주인의 호를 따라 산수정이라 칭했으며, 약간의 변형이 있긴 하지만 18세기 건축 수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대문은 정면 3칸의 맞배지붕 솟을 대문으로 대문의 좌우에 방과 광을 1칸씩 두었다. 건물은 높은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하는데, 언제나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도록 만들어서 사대부 가문의 권위적 위압감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 현재 후손이 기거하면서 관리, 보존하고 있다.

옥천 경율당

1854     2020-04-02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종미3길 120

* 학문을 공부하는 서당, 경율당 *

충북 옥천군 안남면에는 경율당이란 작은 한옥이 있다. 조선 영조 11년(1735)에 문인 전후회가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운 서당이다. 경율은 그의 호다. 평소 율곡 이이를 존경하여 호를 경율이라 하고, 서당 이름을 경율당이라 했다. 구조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사방으로 툇간을 달았고, 뒷면 창고방에는 서책을 보관하던 누락이 설치되어 있다. 용마루에 얹은 장식기와에 ‘옹정30년을유’라는 글귀가 있어 1735년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