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낙안향교

낙안향교

17347     2019-02-15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교촌길 59

조선시대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그 뒤 1658년(효종 9)에 군 동쪽 농암등(籠巖嶝)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고 수차에 걸쳐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東廡)·서무(西廡)·동재·서재·양사재(養士齋)·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순천향교

순천향교

20377     2019-02-15

전라남도 순천시 향교길 60

1407년(태종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1550년에 이건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1801년(순조 1)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풍화루·수호실 등으로 되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의 위패가 동무·서무에는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 향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1인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소장전적으로는 교생의 명부인 [유생안 儒生案] 이 가장 많다. 그 밖에 필사본인 [청금록 靑衿綠],[양사재절목 養士齋節目],[순천부교원이정정식절목 順天府校院釐整定式節目],[향교전답등서안 鄕校田畓謄書案],[보민고절목 補民庫節目] 등 조선 후기의 향교와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옥천서원

3489     2019-02-15

전라남도 순천시 임청대길 18

1564년(명종 19)에 순천부사 이정(李楨)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굉필(金宏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정사(精舍)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68년(선조 1)에 ‘옥천(玉川)’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597년에 소실되었다가 1604년 허건(許鍵)·심윤(沈玧)·정지추(鄭之推) 등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그 뒤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4칸의 경현당(景賢堂), 4칸의 지도재(志道齋), 4칸의 의인재(依仁齋), 1칸의 전사청(典祀廳),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4칸의 고직사(雇直舍) 등이 있다. 사우에는 김굉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서원의 강당인 경현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지도재와 의인재는 각각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서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며, 전사청은 향례(享禮)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두는 곳이다. 이 서원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3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서책은 선조가 내린 사서(四書)를 비롯하여 200여 권의 장서가 소장되어 있고, 재산으로는 전답 8,000평이 있다.

용강서원

2685     2019-02-15

전라남도 순천시 공마당1길 64

1985년 2월 25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1821년(순조 21) 학포 양팽손과 장춘 양신용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방 유림이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용두면 중흥리(지금의 해룡면 중흥리)에 사우를 창건하였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0년 지금의 자리로 이건·복원하면서 용강서원이라 이름하였다. 1994년 사당과 외삼문을 보수하였다. 비교적 경사가 가파른 산 중턱에 있으며 사당을 비롯하여 6개의 건물이 있다. 편액이 지춘문이라고 된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용강서원이라 편액한 강당이 있다. 좁은 대지에 강당과 나란히 좌우로 서재와 동재를 두었다. 강당 바로 뒤에 이정문을 들어서면 약 1.5m의 지반 차를 두고 별도의 담장으로 두른 낙천사가 있다. 제향 공간인 낙천사(樂天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전면의 툇간을 개방한 맞배지붕이다. 2월과 8월에 제향 한다. 주향인 양팽손은 1516년(중종 11)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조광조와 함께 사가독서하였으며 1519년 기묘사화로 삭직되었다. 김안로가 사사된 후 복직되었다. 서화에도 뛰어났다. 양신용은 양팽손의 증손으로 인동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에 이르렀다. 병자호란 때 승주군 해룡면 앵무산봉에 망성암(望聖菴)을 짓고 국권회복을 기원하다 죽었다 한다.

율봉서원

2175     2019-02-15

전라남도 순천시 별량면 우산간동길 1-8

조선 전기의 문신 겸 학자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을 비롯하여 정숙, 정승조(丁承祖) 등 영광정씨 3인에게 향사하는 서원이다. 1824년(순조 24) 호남 유림이 발의하여 창건하였고,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8년 옛 터에 복설하여 오늘에 이른다. 전라남도 순천시 별량면 우산리 간동마을에 있다. 불우헌(不憂軒) 정극인은 벼슬이 정언에 이르렀으나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 후 후학들을 가르쳤다.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 작품인 <상춘곡 賞春曲>의 작가로 유명하다. 정극인의 후손 정숙은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인물로, 1598년 10월 순천 왜교성전투에서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도와 격전을 치르다 패하자 바다에 투신하여 순절하였으며, 사후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정승조 역시 왜교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숙부 정숙과 함께 투신하여 순절하였고,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이천서원

1797     2019-02-15

전라남도 순천시 상사면 동백길 56

1827년(순조 27) 호남 유림이 발의하여 조선 중기의 문신 박세희(朴世熹 1491~?), 박증손(朴曾孫 ?~?), 박대붕(朴大鵬 1525~1592) 등 상주박씨 3인의 유풍(儒風)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1년 후손들이 기금을 모아 옛 자리에 복설하였다. 도원재(道源齋) 박세희는 1514년(중종 9)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홍문관수찬·정언·이조좌랑·장령·홍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사간을 거쳐 좌부승지에 올랐을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 강계로 유배된 후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강(文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운곡(雲谷) 박증손은 기묘사화가 일어나 많은 사림들이 화를 당하자 한성을 떠나 순천 운곡촌으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후진양성에 힘쓰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남포(南浦) 박대붕은 1556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주부 벼슬에 이르렀으나 1565년(명종 20) 을축사화 때 상소를 올렸다 투옥된 후 풀려나 낙향하였다. 임진왜란 때 고경명의 의병대에 가담하여 금산싸움에서 싸우다 순절하였고,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순천 검단산성

21546     2019-02-15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성산리

해룡면 신성리의 순천왜성과 마주 보고 있는 산성이다. 여수반도와 순천시를 잇는 부분의 길목인 검단산(138.4m)의 정상부에 위치하며 눈앞이 광양만이 바라보이는 요새지이다. 검단산성은 정유재란 때 조명 연합 육상군의 지휘부가 주둔했던 임란 전적지로 1598년 9월부터 2개월간 동쪽으로 약 2.7km떨어진 왜성의 소서행장과 대치 치열한 공방전을 치른 임란전적지이다. 1995년 전남 지방기념물 157호로 지정되었으나, 중요성이 인정되어 1999년 12월 22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418호)로 지정되었다.

순천시에서 순천 왜성으로 가는 도로변에서 등산로를 따라 15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면 산성에 이른다. 이 산성은 조선산성 또는 한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검단산성은 정유재란 때 조선과 명군의 연합군이 신성리의 왜교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과 대치하면서 쌓은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1996년 정밀지표조사와 98년~99년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에 축성한 석성으로 판명되었다.

성곽의 규모는 전체길이 약 430m, 외벽높이 1∼3m(추정 높이 약 4∼6m), 내벽높이 2m이상, 성벽두께 5m정도이다. 산성의 형식은 전형적인 테뫼식산성(산봉우리에다 마치 테를 두른 것처럼 산성을 쌓은 형식)이다. 성곽내부의 시설물로는 문지 3개소, 건물지 3개소, 대형우물지 1개소, 저장공 2개소의 유구와 기와류와 토기 및 헐기류, 목기류, 석기류 등 다양한 유물들이산성과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이 산성의 축성시기는 체성의 축성기법이나 출토된 외편들과 토기편들로 보아 6세기 말에서 7세기 전반 경으로 추정된다. 검단산성은 이 지역에서 최초로 조사된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그 중요성은 대단하며 앞으로 조사될 백제 석성의 표본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1.21 무장공비 침투로

20604     2019-02-15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 294

※ 민통초소에 신분증 제시하여 출입 가능 (25인 이상 출입시 일주일 전 신청서 제출 요망)

고랑포에서 서남쪽으로 3.5km지점에 위치한 무장공비침투로는 1968년 1월 17일 23시 북한군 제124군 소속 김신조 외 30명이 남방 한계선을 넘어 침투한 곳이다. 북한은 당시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를 1968년 1월 21일 서울로 잠입시켜 대통령 관저(청와대) 폭파와 요인 암살 및 주요 기관 시설을 파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68년 1월 19일 21시경 파주시 법원리에 거주하는 나무꾼이 신고하여 군·경 합동으로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1968년 1월 20일부터 1월 30일까지 전개되어 사상자 29명, 도주 1명, 체포 1명(김신조)의 전과가 있었으나 우리 군·경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현재 무장공비침투로에는 그 당시 이곳에 주둔한 미군 제2사단 방책선 경계부대에서 설치한 경계 철책과 철조망을 뚫고 침투한 무장공비의 모형물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관할 군부대에서는 1999년 10월 1일자로 민통선 북방 지역 출입 통제를 일부 완화하여 사전 신청에 의한 견학이 가능하다.

* 사건개요
1) 침투일시 - 1968년 1월 17일 23:00
※서울잠입 - 1968년 1월 21일
2) 침투부대 - 북한 제124군 소속 김신조 외 30명
3) 침투경로 - 황해도 연산 출발 1968년 1월 16일 14:00 방책선 통과 법원리 뒷산 도착1월 18일 노고산 비룡에서 1박, 청와대 위치 확인 후 서울 청운동까지 침투
4) 침투목적
- 대통령 관저 폭파 및 요인 암살
- 주한 미 대사관 폭파 및 대사관 직원 암살
- 육군본부 폭파 및 고급지휘관 사살
- 서울교도소 및 서빙고 폭파
- 북한 간첩 대동 월북
5) 발견 - 1968년 1월 19일 21:00 파주시 법원리
6) 작전기간 - 1968년 1월 20일 - 1월 31일 (12일간)
7) 전과 - 생포 1명, 사살 29명, 도주 1명
8) 피해 - 15연대장 이익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민간인 5명 사망,시내버스 4대 완파 및 승무원 피해
9) 복원사업 - 사업량 - 도로포장 147m, 석축 165m, 철조망 600m, 망루 1개소, 조형물 1식(7인), 펜스 81m, 안내판 및 편의시설 등

심곡서원

25564     2019-02-15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 16-9

1650년(효종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하여 위패를 모셨다. 조광조의 무덤이 이곳에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서원을 세우기 위한 논의가 있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모현면에 있는 정몽주(鄭夢周) 제향의 충렬서원(忠烈書院)에 입향하였다가 위패를 옮겨오게 되었다. 설립과 동시에 ‘심곡’이라고 사액되었으며, 양팽손(梁彭孫)을 추가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서, 선현 제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일소당〔日昭堂: 현재의 講堂〕·재실(齋室)·장판각(藏板閣)·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이 있다. 사우에는 조광조와 양팽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지붕의 좌우에 방풍판(防風板)을 달고 겹처마로 되어 있다.

양지향교

2775     2019-02-15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향교로13번길 20

1523년(중종 18)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과 명륜당·내삼문(內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이 향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충렬서원

2598     2019-02-15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충렬로 9-19

1576년(선조 9)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몽주(鄭夢周)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09년(광해군 1)에 ‘충렬(忠烈)’이라 사액되었으며, 그 뒤 정보(鄭保)와 이시직(李時稷)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11년 유림에서 사우(祠宇)를 중건하였고, 1956년에 강당을 복원하고 1972년 전체를 보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6칸의 사우, 내신문(內神門)·외신문(外神門), 동·서 협문(夾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8칸의 강당 등이 있다. 사우에는 정몽주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정보와 이시직의 위패를 배향하였다.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처인성

19859     2019-02-15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

아곡리 입구에 서있는 고려 시대의 토성으로 지금은 동남서쪽에 토성의 흔적만이 길이 250m 정도로 남아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밀려오는 몽고군을 맞아 민병과 승병이 일치단결하여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하고 승전을 하는 기적을 낳게하였던 곳이라 전한다. 이곳을 승장 김윤후가 적장을 사살했다 하여 사장터라 부르기도 한다.

* 유례

고려 고종 19년(1232) 9월 몽고군의 2차 침공 때 승장 김윤후가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하여 승리로 이끈 대몽항쟁의 전승지로 유명하다. 이 대첩에서 관군 못지 않게 처인부곡민들이 합심하여 처인성 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냈다는 사실은 지역민의 단결은 물론 자주 주권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처인성 북쪽 들판은 지금도 사장터로 불려지고 있는데, 일설에는 살리타이가 사살된 장소라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육로의 요충지인 처인에 주둔한 왜병을 무찌르기 위해 수원의 독산성에 집결한 관군의 대부대가 처인을 재탈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