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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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여주)

신륵사(여주)

53971     2019-04-19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 다양한 유물이 숨쉬고 있는 고찰, 신륵사 *

신륵사는 여주읍에서 동북쪽으로 약 2.5km 정도 떨어진 남한강 상류 봉미산 기슭에 있는 오래된 전통 사찰로,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전한다.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1858년 헌종의 조모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호조판서 김병기(金炳冀)에게 명하여 절을 크게 중수토록 하였는데 이때부터 영릉의 원찰로서 의미가 약해지면서 다시 신륵사라 부르게 되었다. 근. 현대사에 있어 신륵사의 활동은 크게 알려지지 않으나, 1925년 열반당 14칸을 새로 짓고, 1929년 강성인(姜性仁) 스님이 주지 재임시 김인주(金仁柱)가 화주(化主)로 명부전을 중건하였다.

* 신륵사의 유래와 전설 *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났는데, 이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워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다.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 신륵사의 다양한 문화 유물 *

신륵사 인근 강가쪽 암반 위에 벽돌로 쌓은 다층 전탑이 있어서 고려 때부터 벽절이라고도 불렸다. 나옹화상이 이 절에서 입적을 했고, 그의 보제존자석종은 1379년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 말의 대표적인 부도 양식을 띠고 있다. 성종 옆에 있는 석종비문은 목은 이색이 썼다. 역사가 깊고 규모도 웅장하며 주위의 경관도 뛰어난 사찰로 경내엔 화려한 극락전을 비롯, 조사당 명부전, 다층석탑, 다층전탑, 석종, 대장각기비 등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8점을 보유하고 있다.

[문화재 정보]
1)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호)
2)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3)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4)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보물 제228호)
신륵사 조사당 근처의 구릉에는 석종 하나가 그에 딸린 비 및 석등과 함께 세워져 있다. 이것은 고려 말 공민왕 때에 왕사를 지낸 보제존자 나옹화상(1320∼1376)의 사리를 모신 부도이다. 종 모양의 형태를 하고 있어서 석종으로 불린다. 이곳에 석등까지 세워져 있는 것은 나옹화상의 위상이 그만큼 높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고려말의 대표적인 석종 부도로서, 이전의 팔각원당형 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의 선구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석종형 부도는 통도사·금산사·용연사·봉암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은 계단탑 형식을 한 통도사·금산사의 양식과 비슷하다. 석종의 높이와 지름은 각각 1.9m와 1.1m이다.
5)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6)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7)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보물 제231호)
8) 신륵사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고양 서오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고양 서오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36397     2019-04-19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92

서오릉이란 조선 왕조의 다섯릉 즉 경릉, 창릉, 익릉, 명릉, 홍릉을 일컫는 말이다. 오릉 이외에도 명종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의 순창원이 경내에 있고, 영조 후궁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생모)의 수경원이 있으며, 최근 숙종의 후궁인 장희빈의 대빈묘도 이곳으로 이장 되었다. 위치상 서울 시내와 다름없을 만큼 가까워서 산책이나 조깅 코스로 좋다.

* 서오릉 약사(사적 제 198호)

1) 경릉 - 덕종(추존)과 비 소혜왕후(추존) 한씨의 능이다. 덕종은 세조의 원자로 태어났으나 20세에 돌아가시고(1457) 뒤에 그의 아들 성종이 즉위 하면서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 한씨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로서 월산대군과 성종형제를 두었으나 성종이 즉위한 뒤 왕비로 추존되면서 소혜왕후라 일컫게 되었다.

2) 익릉 - 숙종의 원비 인경황후 김씨(1661-1680)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로서 현종 12년(1671)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숙종 즉위와 함께 왕비로 책봉되었다. 숙종 6년(1680) 경희궁에서 20세에 승하하였다.

3) 창릉 - 예종과 그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1498)의 능이다. 예종은 세조의 둘째아들로 세조3년(1457)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세조 14년(1468)에 즉위하였다. 안순왕후는 우의정 청주부원군 한백륜의 딸로서 예종 즉위년(1468)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4) 명릉 - 숙종(1674-1720)과 그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 그리고 제 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쌍분으로 되고 인원왕후의 능은 옆에 따로 있어 같은 언덕에 배치된 형식이다. 숙종은 현종의 아들로 태어나 현종8년(1677) 세자로 책봉되었고 예론이 한창 일어나 장희빈을 중심으로 한때 인현왕후 민씨를 몰아낸 사건을 겪었으나,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등 업적을 남겼다. 인현왕후 민씨(1667-1701)는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태어나 숙종 7년에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숙종 15년 왕자 균(뒤의 경종) 책봉 문제에 장희빈의 무고로 폐위당하였으나, 후에 장희빈이 몰락하면서 복위된(1694)뒤 35세로 승하하였다.

5) 홍릉 - 영조(1724-1776)의 비 정성왕후 서씨 능이다. 정성왕후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서 경종 원년 (1721)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왕후는 소생이 없이 영조 33년에 경복궁에서 승하하였다.

6) 수경원 -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산소이다. 영빈 이씨는 영조 11년(1735)에 사도세자를 낳았으며 영조 40년 69세로 승하하였다.

7) 순창원 - 명종(1545-1567)의 원자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산소이다. 순회세자는 명종 1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세에 승하했고, 공회빈 윤씨는 윤옥의 딸로서 선조 25년(1592년) 3월 3일 승하했다.

8) 대빈묘 -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1701)의 묘이다. 숙종은 궁녀 장소의에게서 숙종 14년에 왕자 균(경종)을 얻어 이듬해 균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장소희를 희빈으로 대하였다. 그후 왕비 인현왕후를 폐비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였으나 이를 후회하고 숙종 27년(1701)에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희빈은 사사되었다. 원래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있었는데 1969년 6월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창녕 석빙고

창녕 석빙고

22806     2019-04-19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 조선시대 양식을 갖춘, 창녕석빙고(경남 창녕) *

석빙고란 추운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더운 여름까지 보관하여 사용하였던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얼음 창고이다. 조선시대에 중수하였다고 보는 빙고(氷庫)이다. 이는 구조양식의 측면과 장빙(藏氷)의 풍속이 그 당시에 제도화되어 성행하였던 점을 미루어 보아서이다. 이 빙고는 봉토도 거의 완전하며, 외부의 모양은 마치 거대한 고분처럼 보이고 뒤에 흐르는 개천에 직각되게 남북으로 길게 구축되었다. 빙실(氷室)의 입구는 남쪽에 시설하였는데, 좌우에 장대석(長大石)을 옆으로 건너지르며 쌓아 올려서 천정을 구성하였으며 사이의 천정에는 외부로 통하는 환기공 (換氣孔)이 두 곳 설치되었다. 벽은 잡석(雜石)으로 쌓았으나 평평한 방벽(房壁)이 되게 표면(表面)을 치석(治石)하였다. 이러한 구조양식은 석빙고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경주나 안동의 석빙고와 동일한데 규모에 있어 이 석빙고가 약간 작을 뿐이다.

* 석빙고의 축조 유래 *

빙고 우측에 남아있는 비에 의하면 “崇禎紀元後再壬戌二月初一日女四月初十日畢”이라 새겨져 있으며 조선 영조 18년(1742)에 현감 신서(申曙)등이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 정보]
지정번호 : 보물 제310호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시대 : 1742년(영조 18) 완공
크기 : 빙실 길이 11m, 폭 3.6m, 높이 3.7m
분류 : 석빙고

영동향교

영동향교

18179     2019-04-19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성안길 20-9

조선 선조 때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60년(현종 1)에 성내(城內)로 이건, 복원하였다. 1676년(숙종 2)에 다시 구교리로 이전하였다가 1754년(영조 30)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과 6칸의 명륜당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이 향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소장전적은 판본이 몇 권 있을 뿐이다.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옥천 이지당

옥천 이지당

21598     2019-04-19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이백6길 126

체육과* 성리학자 조헌을 기리는 서당, 이지당 *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이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당으로 1977년 12월 6일 충북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중엽 옥천읍 옥각리에 사는 금(金), 이(李), 조(趙), 안(安)의 4문중이 합작해서 세운 서당이다. 당초에는 각신동(覺新洞)이라는 마을 앞에 있었으므로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후학을 가르쳤던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조헌(趙憲:1544~1592)의 친필로 된 ‘각신서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조헌은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도원(陶原) 또는 후율(後栗)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이의 문인 가운데서도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1,700여 명을 규합하여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승병(僧兵)과 함께 청주(淸州)를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후 금산싸움에서 700명의 의병과 함께 순국하였다.

* 이지당의 유래 *

각신서당은 후에 송시열(宋時烈)이 《시전(詩傳)》에 있는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 즉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 라는 뜻의 문구에서 끝의 ‘지(止)’자를 따서 이지당(二止堂)이라고 고쳐 불렀다.후 퇴락된 것을 1901년(광무 5) 이 서당을 세웠던 4문중에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 서당 건물은 목조 6칸의 강당과 누각으로 되어 있다.

봉유재

봉유재

15921     2019-04-19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내동1길 40-2

이 건물은 조선 중종때 안주목사를 지낸 박성량(朴成樑)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후손들이 인조 10년(1632년) 3월에 건립한 재실이다. 처음 이 건물이 세워졌을 때 현판도 달지 않고 그냥 소종재(小宗齋)라고 일컬었는데 이는 곧 대종재(大宗齋)인 흥학당 앞에 세워져서 이런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세대가 멀어지고 자손이 번창하자 "선조를 받들고 후손에 복을 준다(奉先裕后)"라는 뜻의 현판을 달고 봉유재라 했다 한다.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건물로 정면 2칸이 큰 대청마루를 이루고 있다.

※ 목사 : 지방의 각 목(牧)을 맡아 다스리던 정삼품 외직 문관

영동 화수루

영동 화수루

16587     2019-04-19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 하도대3안길 33-18

이 건물은 원래는 조선 중기인 명종 원년(1546)에 옥계서당으로 세웠던 것을 순조 4년(1804)에 고성남씨 수일파 문중에서 후손들에게 학문을 전수할 목적으로 현 위치에 옮겨짓고 이름도 바꾼 것이라고 한다. 정면2칸, 측면2칸의 간결한 누각식의 건물로, 전면 2칸은 우물 마루를 깐 누마루로 만들고 후면 2칸은 온돌방을 들였다.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건축양식에 따라 지은 것인데,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는 초익공의 간단한 공포를 짰으며 기둥 사이는 3구씩의 소로만을 끼웠다. 정면과 측면의 칸수를 같게 하고 사면에는 난간을 돌리었으며, 누마루를 두는 등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이용하던 누정건축의 특징이 잘 갖추어져 있다.

영동 한천정사

영동 한천정사

17437     2019-04-19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원촌동1길 48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 선생이 한천팔경(寒泉八景)이 있는 이곳에 잠시머물며 작은 정사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였는데 후에 한천서원(寒泉書院)을 짓고 우암을 제사하다 고종때(1868)에 철거된 후에 후학들이 다시 유림회를 결성 한천정사(寒泉精舍)를 건립하였으나 정확한 건립연대는 전해지지 않고 현재에 이른다. 한천정사(寒泉精舍)는 정면 3칸 측면 2칸(1칸반)의 목조한식팔작기와집으로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으로 방이 설치되어 있으며 전면으로는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건물은 자연석 주초위에 4모기둥을 세우고 도리집으로 하였다.주변에 막돌담장을 두르고 정면에 일각문이 있다. 기둥에는 한천팔경을 글로 새겨 주련을 하였다. 건축형식은 비교적 고식이 잘 유지되어 있는 건물로서 월유봉과 장교천이 선경(仙境)을 이루는 장소에 위치하며 우암 선생의 자취를 살필 수 있게 하는 곳으로 주변의 한천팔경과 양측에 온돌방과 중앙에 마루를 두어 글읽는 장소로서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 시대 : 조선시대

김해 봉황동 유적

김해 봉황동 유적

25189     2019-04-19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63번길 50

* 철기시대의 가야문화, 봉황동 유적 *

가야시대의 대표적인 조개무지로서 1920년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초로 발굴조사된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구 문화재자료 제87호)가 합쳐져 2001년 2월 5일 사적으로 확대 지정된 유적이다. 또한 구릉 위에는 황세장군과 여의낭자 전설에 관령된 여의각, 황세바위 등이 남아있으며, 가야시대 고상가옥, 주거지 등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철기시대 초기의 것으로, 높이가 7m, 동서의 길이 약 130m, 남북의 너비 약 30m의 낮은 언덕 위에 이루어져 있다. 구릉의 남쪽에는 회현동의 마을이 인접해 있고, 북동쪽 낭떠러지 밑에도 민가가 들어서 있어 패각층이 드러난 단면과 구릉 위에 흩어진 흰 조개껍데기를 볼 수 있다. 처음 알려진 것은 1907년이지만, 1920년에 있었던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비롯하여 그 뒤 몇 차례의 학술조사를 통하여 이 유적에 대한 문화적 성격과 연대의 개요가 밝혀져서, 한국 선사시대의 유적지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지이다. 일련의 발굴을 통하여, 이른바 김해토기(金海土器)라고 명명(命名)된 토기의 조각들이 가장 많고, 도끼와 손칼과 같은 철기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철기가 이미 일상생활의 도구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철기 이외에 골각제품(骨角製品)으로서도 골촉(骨鏃) ·골침(骨針) 등과 송곳 같은 찌르개류[尖頭類]가 함께 출토되었다. 김해토기는 종래의 민무늬토기보다 높은 온도로 구워서 만든 발달된 경질(硬質)의 토기로서, 그 특색은 문살무늬나 삿무늬 등의 타형(打形)무늬가 있다는 점이다. 타형무늬는 토기를 단단히 하기 위하여 무늬가 새겨진 방망이로 두드려서 생긴 것이다. 특히 후일에 와서 신라토기(新羅土器)의 모체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원시신라토기라고도 한다.

* 봉황동 유적의 가치 *

1920년의 발굴 때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때의 돈인 화천(貨泉) 1개가 나와 이 패총의 상한연대(上限年代)가 밝혀졌고, 또 함께 발견된 탄화미(炭化米)는 한국의 벼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뒤 34 ·35년의 발굴을 통하여 한 무리의 돌널무덤과 그 옆의 독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한 개의 옹관에서 세형동검(細形銅劍)과 청동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남방식 고인돌[南方式支石墓]의 뚜껑돌로 보이는 한 개의 큰 돌이 현재에도 있다. 이 유적들 사이의 층위적 관계(層位的關係)는 아직도 연구할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구계서원

2812     2019-04-19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구암두문로 361-17

이 서원은 1606년(선조 39)에 세웠으며, 1611년(광해군 3) 사당인 구산사를 세웠다. 1676년(숙종 2)에 ‘구계’라는 현판을 나라에서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23년(경종 3)에는 김덕함(金德諴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던 것을 1931년에 다시 세웠다.

덕천서원

1770     2019-04-19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장팔길 594

1979년 이학두가 선조들을 기려 부지 3만 3,000㎡에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서원 건물과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덕산정, 팔각정, 관리사 등이 있다. 봄철 벚꽃 놀이를 비롯하여 사철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위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오례사

1040     2019-04-19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오례길 127-5

백촌 김문기(1399∼1456)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이를 계승하고자 세운 곳이다. 김문기 선생은 세종 8년(1426)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사육신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한 사건으로 희생당하였다. 그 뒤 영조 7년(1731) 복관되고, 영조 33년(1757) 충의(忠毅)란 시호가 내려졌다. 오례사는 선생의 후손이 1870년에 세웠으며, 1994년에 크게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외삼문, 추원재, 내삼문, 사당이 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추원재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