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훈몽재 유지

훈몽재 유지

2265     2020-02-19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2길 83

훈몽재는 조선 명종 3년(1548) 하서 김인후가 처향(妻鄕)인 순창의 점암촌에 이거하고, 초당을 세워 훈몽이라는 편액을 걸고 강학했던 곳이다. 김인후가 훈몽재에 머물렀던 시기는 1548년부터 그가 부친상을 당하여 장성으로 돌아간 1549년까지 약 2년간이다.이후, 1680년경 김인후의 5대 손인 김시서가 인근에 자연당을 짓고 기거하며 훈몽재를 중건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나, 다시 퇴락하였다. 1820년경 김인후의 후손들이 점암마을에 훈몽재를 중건하고, 어암서원을 건립하여 김인후, 김시서, 정철, 이이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훈몽재가 중건되었으나, 1951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2005년 전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표토층의 10~20㎝ 아래에서 훈몽재의 유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현재는 복토작업이 이루어져 있다.지정대상지에 인접하여 훈몽재와 부속건물인 자연당, 양정관, 심연정이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 추령천변에는 대학암(大學巖)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송강 정철이 이곳에서 김인후에게 대학을 배웠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경앙사

경앙사

18311     2020-02-19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경앙사(景仰祠)는 1964년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선생의 문인들이 선생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춘제(春祭)를 드리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이 곳에서는 석농 오진영 선생과 그의 스승인 전우선생과 오희상 선생 등 세 분을 모시고 있다. 건물의 총 건평은 26㎡(8평)으로 겹처마 맞배 지붕의 한옥이며 홍살문, 삼문, 사당 등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특히 현판 액자는 석농(石農)의 제자인 월헌(月軒) 이보림(李普林)선생이 썼다고 전해지는데 여기서 ‘경앙’은 “(高山仰止 景行行止) 즉, 산은 사람을 우러러 보고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므로 천하 만인에게 존경을 받는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한다.

백인제가옥

백인제가옥

8326     2020-02-19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7길 16

북촌 가회동에 위치한 백인제 가옥은 근대 한옥의 양식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일제강점기 한옥이다.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460㎡의 대지 위에 당당한 사랑채를 중심으로 넉넉한 안채와 넓은 정원이 자리하고, 가장 높은 곳에는 아담한 별당채가 들어서 있다. 백인제가옥은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변화를 수용하여, 건축 규모나 역사적 가치 면에서 윤보선 가옥과 함께 북촌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소개되고 있다.1907년 경성박람회 때 서울에 처음 소개된 압록강 흑송(黑松)을 사용하여 지어진 백인제 가옥은 동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과 구별되는 여러 특징들을 갖고 있다.사랑채와 안채를 별동으로 구분한 다른 전통한옥들과는 달리 두 공간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또한 일본식 복도와 다다미방을 두거나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한 것은 건축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사랑채의 일부가 2층으로 건축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전통한옥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백인제 가옥만의 특징이다.정원에서는 당당한 사랑채를, 중정에서는 넉넉한 안채를, 그리고 후원에서는 아담한 별당채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백인제 가옥은 우리 한옥의 다양한 아름다움이 한 자리에 모인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안성도기동삼층석탑

안성도기동삼층석탑

18307     2020-02-19

경기도 안성시 도기동 184

도기동어구 왼쪽 작은 동산에 세워져 있는 석탑이다. 기단(基壇)·탑신(塔身)·옥개(屋蓋) 등 각 부재(部材) 모두 화강암으로 조성, 중적(重積) 되었으며 석탑의 형태는 일반형을 이루고 있다. 수매의 장대석(長大石)으로 지대석을 마련하고, 현재 기단(基壇)에 해당하는 부분과 초층(初層)은 수매의 판석(板石)으로 조립되었으며 양우주(兩隅柱)가 있다.1매석으로 된 갑석(甲石)에는 부연(副椽)이 있고 그 위의 석재들은 탑신부재 또는 기단부재등으로 조립되었다. 옥개 받침이 있는 옥개석은 없으며, 현재 2층에 해당하는 옥개석만 하부에 2단의 받침을 두었을 뿐이다. 옥개는 평박(平薄)하고 추녀는 수평이며 전체적으로 둔중(鈍重)한 느낌을 준다.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로 생각되나 법당지(法堂址)등은 상상하기 어렵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연대 - 고려시대
* 규격 - 총높이 3.49m
* 재질 - 화강암

낙안향교

낙안향교

17382     2020-02-19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교촌길 59

조선시대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그 뒤 1658년(효종 9)에 군 동쪽 농암등(籠巖嶝)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고 수차에 걸쳐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東廡)·서무(西廡)·동재·서재·양사재(養士齋)·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순천향교

순천향교

20426     2020-02-19

전라남도 순천시 향교길 60

1407년(태종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1550년에 이건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1801년(순조 1)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풍화루·수호실 등으로 되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의 위패가 동무·서무에는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 향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1인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소장전적으로는 교생의 명부인 [유생안 儒生案] 이 가장 많다. 그 밖에 필사본인 [청금록 靑衿綠],[양사재절목 養士齋節目],[순천부교원이정정식절목 順天府校院釐整定式節目],[향교전답등서안 鄕校田畓謄書案],[보민고절목 補民庫節目] 등 조선 후기의 향교와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건축물들

일제강점기 건축물들

39824     2020-02-19

전라남도 목포시 영산로29번길 6

* 일제강점기의 한이 서려있는 건축물들 * 목포는 일제강점기 당시 군수물품이나 한반도의 물품을 일본으로 빼돌렸던 항구 중 하나였다. 그러다보니 일제강점기의 건물도 많이 남아있다. [구 목포 일본영사관(사적 제289호/1981.09.25 지정)] 1) 목포 최초의 근대식 건물로 준 르네상스식 양식을 갖추고 있고 1981년 9월 25일 사적 289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목포문화원과 박화성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2) 소재지 - 전남 목포시 대의동 2가 15 3) 건립년도 - 1900년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등록문화재 제29호/2002.05.31 지정)] 1) 1920년에 건립한 순수한 민족자본은행으로 1942년 민족자본 억제정책으로 일제에 의해 동일은행으로 흡수되었고 1943년 다시 조흥은행을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소재지 - 전남 목포시 해안로249번길 34 3) 건립년도 - 1929년 [구동양척식주식회사목포지점(전라남도 기념물 제174호/1999.11.20 지정)] 1) 일제강점기때 농민수탈의 선봉이었던 동양척식의 목포지점으로 각종 산업과 시가지 신축건물에 자금을 대부하여 사업을 확장시켜 나갔다. 2) 소재지 - 전남 목포시 중앙동 2가 6
3) 건립년도 - 1920년 [목포 구 청년회관(등록문화재 제43호/2002.09.13 지정)] 1) 1930년대 청년운동과 민족운동의 산실이었고, 1934년 일제하에서 김기진 선생 등이 "조선청년"이라는 잡지를 발간한 일이 있었는데 창간호에 실린 박화성 선생의 "헐어진 청년회관" 이란 작품이 문제되어 2호까지 내고 총독부로부터 발행정지 당한 작품의 소재로 유명하다. 2) 소재지 - 전남 목포시 차범석길 35번길 6-1 3) 건립년도 - 1930년 [목포 중앙교회(등록문화재 제340호/2007.07.03 지정)] 1) 일본의 전통사찰로서 원내에 일본인 소학교가 있었는데 현재는 1957년부터 목포중앙교회로 이용하고 있다. 2) 소재지 - 전남 목포시 영산로 75번길 5 3) 건립년도 - 1920년 [목포 양동교회(등록문화재 제114호/2004.12.31 지정)] 1) 1987년 봄 미국 남장로파 선교회 소속의 Eugen Bell에 의해 선교가 시작된 개신교 목포 최초의 서구적 교회다. 1987년부터 현재까지 교회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으며, 1907년 영흥학교와 정명학교도 설립하였다. 2) 소재지 - 전남목포시 호남로 15 3) 건립년도 - 1910년 [목포 정명여자중학교 구 선교사 사택(등록문화재 제62호/2003.06.30 지정)] 1) 1937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까지 당했던 민족혼의 산실로 목포여자교육기관의 효시이다. 2) 소재지- 전남 목포시 삼일로 45 3) 건립년도 - 1910년

울산 경상좌도병영성

2278     2020-02-19

울산광역시 중구 서동

1417년(태종 17)에 쌓은 울산병영성은 해발 45m 이하의 낮은 구릉을 이용해 쌓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읍성으로 경상좌도 병마도절제사영의 주둔지였다.전체의 평면 모양은 타원형이며, 성의 크기는 둘레 약 1.2㎞, 높이 약 3.7m 정도 된다. 처음 건립할 당시에는 여장(女墻: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벽 위에 설치한 낮은 담장과 같은 구조물) 등 기본적인 시설만 갖추었다가 세종·문종대에 와서 옹성(甕城)·적대(敵臺:雉城)·해자(垓字) 등 여러 방어시설을 설치하였다.

내부시설로 우물·도랑·창고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과거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 위치를 기박산성 자리로 옮기기 위해 그 둘레에 붉은 기를 꽂아두었는데 별안간 동해 쪽에서 일진의 광풍이 거세게 몰아쳤다고 한다. 이때 기 하나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갔는데, 그 방향을 따라가 보니 현재의 병영성 위치였다고 한다. 성을 풍수지리적 길지에 지어 외적의 침략을 막고 고을을 지키려는 백성들의 바램이 투영된 설화라 하겠다.

오랫동안 나라의 동남쪽 해안방어를 담당하던 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부근에 주둔하던 왜군이 이곳의 돌을 가져다 울산왜성을 쌓으면서 훼손되었다. 현대에 들어 도시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성터만 남았다가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이 진행되어, 지금은 많은 부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용강서원

2692     2020-02-19

전라남도 순천시 공마당1길 64

1985년 2월 25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1821년(순조 21) 학포 양팽손과 장춘 양신용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방 유림이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용두면 중흥리(지금의 해룡면 중흥리)에 사우를 창건하였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0년 지금의 자리로 이건·복원하면서 용강서원이라 이름하였다. 1994년 사당과 외삼문을 보수하였다. 비교적 경사가 가파른 산 중턱에 있으며 사당을 비롯하여 6개의 건물이 있다. 편액이 지춘문이라고 된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용강서원이라 편액한 강당이 있다. 좁은 대지에 강당과 나란히 좌우로 서재와 동재를 두었다. 강당 바로 뒤에 이정문을 들어서면 약 1.5m의 지반 차를 두고 별도의 담장으로 두른 낙천사가 있다. 제향 공간인 낙천사(樂天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전면의 툇간을 개방한 맞배지붕이다. 2월과 8월에 제향 한다. 주향인 양팽손은 1516년(중종 11)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조광조와 함께 사가독서하였으며 1519년 기묘사화로 삭직되었다. 김안로가 사사된 후 복직되었다. 서화에도 뛰어났다. 양신용은 양팽손의 증손으로 인동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에 이르렀다. 병자호란 때 승주군 해룡면 앵무산봉에 망성암(望聖菴)을 짓고 국권회복을 기원하다 죽었다 한다.

율봉서원

2178     2020-02-19

전라남도 순천시 별량면 우산리

조선 전기의 문신 겸 학자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을 비롯하여 정숙, 정승조(丁承祖) 등 영광정씨 3인에게 향사하는 서원이다. 1824년(순조 24) 호남 유림이 발의하여 창건하였고,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8년 옛 터에 복설하여 오늘에 이른다. 전라남도 순천시 별량면 우산리 간동마을에 있다. 불우헌(不憂軒) 정극인은 벼슬이 정언에 이르렀으나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 후 후학들을 가르쳤다.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 작품인 <상춘곡 賞春曲>의 작가로 유명하다. 정극인의 후손 정숙은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인물로, 1598년 10월 순천 왜교성전투에서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도와 격전을 치르다 패하자 바다에 투신하여 순절하였으며, 사후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정승조 역시 왜교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숙부 정숙과 함께 투신하여 순절하였고,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이천서원

1799     2020-02-19

전라남도 순천시 상사면 동백길 56

1827년(순조 27) 호남 유림이 발의하여 조선 중기의 문신 박세희(朴世熹 1491~?), 박증손(朴曾孫 ?~?), 박대붕(朴大鵬 1525~1592) 등 상주박씨 3인의 유풍(儒風)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1년 후손들이 기금을 모아 옛 자리에 복설하였다. 도원재(道源齋) 박세희는 1514년(중종 9)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홍문관수찬·정언·이조좌랑·장령·홍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사간을 거쳐 좌부승지에 올랐을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 강계로 유배된 후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강(文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운곡(雲谷) 박증손은 기묘사화가 일어나 많은 사림들이 화를 당하자 한성을 떠나 순천 운곡촌으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후진양성에 힘쓰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남포(南浦) 박대붕은 1556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주부 벼슬에 이르렀으나 1565년(명종 20) 을축사화 때 상소를 올렸다 투옥된 후 풀려나 낙향하였다. 임진왜란 때 고경명의 의병대에 가담하여 금산싸움에서 싸우다 순절하였고,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순천 검단산성

21576     2020-02-19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성산리

해룡면 신성리의 순천왜성과 마주 보고 있는 산성이다. 여수반도와 순천시를 잇는 부분의 길목인 검단산(138.4m)의 정상부에 위치하며 눈앞이 광양만이 바라보이는 요새지이다. 검단산성은 정유재란 때 조명 연합 육상군의 지휘부가 주둔했던 임란 전적지로 1598년 9월부터 2개월간 동쪽으로 약 2.7km떨어진 왜성의 소서행장과 대치 치열한 공방전을 치른 임란전적지이다. 1995년 전남 지방기념물 157호로 지정되었으나, 중요성이 인정되어 1999년 12월 22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418호)로 지정되었다.

순천시에서 순천 왜성으로 가는 도로변에서 등산로를 따라 15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면 산성에 이른다. 이 산성은 조선산성 또는 한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검단산성은 정유재란 때 조선과 명군의 연합군이 신성리의 왜교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과 대치하면서 쌓은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1996년 정밀지표조사와 98년~99년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에 축성한 석성으로 판명되었다.

성곽의 규모는 전체길이 약 430m, 외벽높이 1∼3m(추정 높이 약 4∼6m), 내벽높이 2m이상, 성벽두께 5m정도이다. 산성의 형식은 전형적인 테뫼식산성(산봉우리에다 마치 테를 두른 것처럼 산성을 쌓은 형식)이다. 성곽내부의 시설물로는 문지 3개소, 건물지 3개소, 대형우물지 1개소, 저장공 2개소의 유구와 기와류와 토기 및 헐기류, 목기류, 석기류 등 다양한 유물들이산성과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이 산성의 축성시기는 체성의 축성기법이나 출토된 외편들과 토기편들로 보아 6세기 말에서 7세기 전반 경으로 추정된다. 검단산성은 이 지역에서 최초로 조사된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그 중요성은 대단하며 앞으로 조사될 백제 석성의 표본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