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김대중 대통령 생가

김대중 대통령 생가

24780     2020-04-06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길 255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공지사항
※ 내용 : 임시휴관 (~ 상황종료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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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도가 세간의 큰 관심을 끌게 된 사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파란과 곡절을 상징하는 '인동초, 김대중' 이란 거목을 낳은 고장이라는 것이다. 지난 1992년 대통령 선거 무렵에는 그의 생가 집터가 있는 후광리에 수백명의 국내기자와 외신기자들이 몰려드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으며,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생가도 지금은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1999년에 종친들이 성금을 모으고 대구 노인복지대학노인회에서 120만원을 모금해 보내오기도 하여 집터만 남아있던 생가의 구조물을 그대로 이용, 어은리마을에 집을 짓고 살던 주민으로부터 다시 집을 사들여, 후광리에 대지 2,466.12m²(746평), 건평 59.5m²(18평)의 목조초가 본체와 창고, 측간으로 구성된 생가를 원형대로 복원(신안군 향토자료 제23호)하여 신안군에 기증하였으며,군에서는 복원된 김대통령 생가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주변에 화장실 등 기본시설을 갖춰 찾아오는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마산로봇랜드

마산로봇랜드

0     2020-04-06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로봇랜드로 250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공지사항
※ 내용 : 임시휴장 (2020.02.27 ~ 202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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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로 로봇을 테마로 한 테마파크인 로봇랜드는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와 로봇체험, 로봇관람시설로 구성돼 있다. 11개의 로봇 체험실은 기존 테마파크와 차별화되어 관람객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삼탄아트마인

삼탄아트마인

5851     2020-04-06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 1445-44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공지사항
※ 내용 : 임시휴관 (2020.02.27 ~ 202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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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탄아트마인은 함백산 850높이에 위치하였으며 40년간 운영하다 2001년에 폐광된 옛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부지에 문화예술광산1호로 재 탄생한 곳이며, 한국인이 가봐야 할 곳 관광100선에 선정되었고 국가정책 발표 창조사업의 우수사례로 선정된 문화예술파크다. 공간구성은 10개의 미술관과 회의실 레지던시룸 까페등을 관람하며 이용할 수 있으며 옛 광업소시설인 세화장 조차장, 권양기등 내부시설과 지하 갱에 산소를 공급하던 압축기실을 원시 미술작품과 함께 전시한 창의적이고 조화로운 원시미술관을 관람할 수 있다. 또한 10만점의 유물이 수장고에 보관, 전시되고 있는 국내유일한 폐광산을 할용한 전시관이자 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다.

창경궁

창경궁

60033     2020-04-06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공지사항
※ 내용 : 대온실(2/25~4/19 휴관), 안내해설&음성안내기 대여중단 중지(2/8~별도 해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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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_20 한국관광 100선 ※

창경궁은 세종대왕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고자 1418년에 지은 수강궁이 그 전신이다. 이후 성종 임금 대로 와서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을 짓고 창경궁이라 명명했다.창경궁에는 아픈 사연이 많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적이 있고 이괄의 난이나 병자호란 때에도 화를 입었다. 숙종 때의 인현왕후와 장희빈, 영조 때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이야기 등이 창경궁 뜰에 묻혀있다. 사적 제 123호인 창경궁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하여 창경원이라 격하되고 동물원으로 탈바꿈 했었으나, 일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한 온 겨레의 노력으로 1987년부터 그 옛날 본래 궁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홍화문, 명정전(조선 왕조의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임), 통명전, 양화당, 춘당지 등이 있으며 구름다리를 통하여 종묘와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다.

* 주요 문화재 - 홍화문(보물 제 384호), 명정문(보물 제 385호), 명정전(국보 제 226호), 통명전(보물 제 818호), 옥천교(보물 제 386호)

[창경궁 홍화문 - 보물 제384호(1963년 1월 21일 지정)]
혜화문은 도성의 동북쪽에 위치한 도성 4소문 중의 하나로서 태조 5년(1396) 9월 도성의 창축과 함께 건설되었는데 이 때의 문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 그러나 성종 14년(1483)에 세운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문이라고 명명하였으므로 창경궁의 동문이름과 같은것을 피하기 위하여 중종 6년(1511)에 홍화문을 혜화문이라고 개칭하였다. 창경궁은 원래 수강궁이 있었던 곳으로, 1418년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위해 고쳐지었다. 그러다가 성종조에 대왕대비와 대비를 모시기에 부족한 궁궐을 보충하기 위해 수강궁터에 새로이 창경궁을 창건하였다. 창경궁은 서울의 다른 궁궐과 같이 임진왜란 때 불탔으나, 광해군이 주요 건물들을 중창하였다. 창경궁의 명정전과 명전문 그리고 홍화문이 그 때 중창된 건물들로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창경궁은 그 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파괴되어 궁궐로써의 면모를 많이 잃었다. 1909년 창경궁은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원하면서 많은 전각들이 헐려 버렸고, 1911년에는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바뀌었다. 해방 후에도 창경원으로 계속 존속해 오다가 1984년부터 복원을 통해 비로소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홍화(弘化)'의 뜻은 교화, 덕화를 널리한다는 뜻으로 창경궁의 다른 전각들의 이름과 함께 서거정이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으로 꾸몄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한층 더 돋구고 있다. 여러차례의 수리와 단청으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었지만, 창경궁·창덕궁 같은 건물과 함께 17세기 초반 목조건축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창경궁 관천대 - 보물 제851호(1985.08.09 지정)]
서울에는 현재 조선시대에 만든 2개의 관천대가 있다. 하나는 창경궁 안에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작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옛 북부 관상감 자리인 전 휘문고등학교 교지에 있는 것인데, 두 관천대는 구조나 크기, 제작 방법이 거의 같다. 창경궁 안에 있는 이 천문 관측소는『서운관지(書雲觀志)』에 의하면 조선 숙종 14년(1688)에 만들어졌다. 높이 3m, 가로 2.9, 세로 2.3m 정도의 화강암 석대(石臺) 위에 조선시대 기본적인 천체관측 기기의 하나인 간의를 설치하고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간의는 없고 석대만 남아 있는데, 당시에는 관측소를 소간의대, 또는 첨성대라고도 불렀다. 관상감의 관원들은 이 관측대에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끊임없이 관측하였다. 17세기의 천문 관측대로서는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귀중하며, 관상감에 세워졌던 조선 초기의 또 하나의 관천대와 함께 조선시대 천문대 양식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창경궁 풍기대]
창경궁에 있으며 조선 후기(18세기)에 제작되었다.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크기는 높이225cm, 하부 대석 높이 91cm, 넓이 62cm×62cm, 상부 팔각주 높이 135cm, 경 43cm이다. 「또 대궐 가운데에는 풍기가 있는데 이는 곧 옛부터 바람을 점치려는 뜻으로서, 창덕궁의 통제문 안과 경희궁의 서화문 안에 돌을 설치하고, 거기에 풍기죽(風旗竹)을 꽂아 놓았었다.」 화강석을 다듬어 만든 풍기대에는 아래에 상을 조각한 대를 놓고 그 위에 구름 무늬를 양각한 팔각주를 세운 모양으로 되어 있다. 팔각주의 맨 위의 중앙에는 깃대를 꽂는 구멍(직경 4.5cm)이 있고 그 아래 기둥 옆으로 배수 구멍이 뚫려 있다. 깃대의 길이는 확실치 않고, 깃대 끝에 좁고 긴 깃발을 매어 그것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잴 수 있었다.

풍향기의 구조와 모양은〈동궐도(東闕圖)〉의 그림으로 알 수 있다. 이 풍기대들은 창덕궁과 경희궁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측우기와 수표가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기인데 대해 풍기는 바람의 방향과 강도를 측정하는 풍향계이다. 풍향의 측정은 농업 기상학에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관측 자료이다. 풍기에 의한 풍향의 관측은 아마도 세종 때부터는 제도화되었으리라고 생각되고, 수표의 경우와 같이 처음에는 풍기대를 절의 당간지주석처럼 만들었으리라고 추측된다. 풍향은 방향으로 측정되어 24향으로써 표시되었다. 또 풍속은 그 강도에 따라 몇 단계로 구분되었는데 아마도 강우량의 경우처럼 8단계 정도로 분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나무가 뽑힐 정도의 바람은 대풍이라 불렀고,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아갈 정도의 바람은 가장 강한 것으로 폭풍이라고 하고, 대풍과 폭풍은 풍이(風異)로서 특히 기록되었다. 풍기대는 지금은 없어지고 그림으로만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풍향계대로서 그 유용한 관측기의 실증적 유물로 기상 관측기의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창경궁 명정전 - 국보 제226호(1985.01.08 지정)]
창경궁(昌慶宮)의 정전(正殿)으로 정면 5칸 60.4척, 측면 3칸 32.28척에 단����� 팔작지붕에공포(慊包)는 다포(多包) 형식을 취하고 있다.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후면에 따로 지은 툇간(退間)이 부속되어 있다. 기단(基壇)은 이중기단으로 이 기단은 지세에 따라 3면에 적석(積石)을 한 것으로 전면의 중앙과 북쪽 중앙에 화강석의 계단이 시설되어 있다. 계단 중앙에는 쌍봉(雙鳳)을 부각(浮刻)하였으며 기단은 장대석(長臺石)을 쌓았���며, 난간은 설치하지 않았다. 건물은 이중기단 위에 다시 장대석으로 한층 돋음한 지면에 세워졌는데 초석은 원형이다. 축부(軸部)는 16개의 평주(平柱)와 4개의 고주(高柱)로 형성되어 있고 고주는 전(殿)의 전면에만 배치되어 전면이 툇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정면의 중앙 3칸은 분합문이 설치되어 있고 좌우 툇간은 하단에 적벽돌이 약 12층 쌓여 있다. 공포(慊包)는 내4출목, 외3출목 포작(包作)을 평방(平枋) 위에 밀조(密組)하였다.

제공(提慊)의 쇠서는 수설(垂舌), 첨차(쿊遮) 뒷몸은 행공첨차 끝처럼 직절(直絶), 바닥을 굴리고 그 부분을 초각(草刻)하여 장혀몸을 따라 도리에까지 솟구치게 하였고 보 아래에는 첨차가 모두 한몸으로 모두어져 당초각(唐草刻)된 양봉이 되었다. 출목(出目) 사이에는 순각천장을 만들었다. 공포의 짜임새는 대단히 견실하고 쇠서의 곡선은 경직하며 초각 솜씨도 힘차고 긴장미가 있어 조선 초기의 수법을 발견할 수 있다.가구(架構)는 대량(大樑)이 고주와 뒷면 평주(平柱) 공포 위에 걸리고 그 위에 종량(宗樑)과 대공(臺工)이 종도리를 받고 있으나 이 부분에 잡다한 보강재(補强財)가 혼입되어 있어 종도리와 중도리 사이가 빈 공간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대량 윗몸에 따라 우물천장이 가설되어 내부에서 보이지는 않는다. 처마는겹처마로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마루에는 취두(鷲頭), 합각마루 끝에는 용을 새기고 추녀마루에 잡상(雜像)을 두었다. 이 건물에서는 주간 문비(門扉)와 광창(光窓)의 구성이 광해조의 재건 당시의 것으로 근정전(勤政殿) · 인정전(仁政殿) 등과 같은 모양을 하여 타 궁전 문비의 모범이 된다고 한다.

[창경궁 대온실 - 등록문화재 제83호(2004.02.06 지정)]
대한제국 순종 융희3년(1909)에 준공한 온실로써, 건축 당시 한국 최대의 목조구조의 온실이었으며, 진열식물은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 등을 전시하였다. 1986년 창경궁 정비 중창공사를 계기로 우리나라 자생난을 중심으로 세계의 각종난을 진열하고 있으나 앞으로 국내 자생식물 단일온실로 특성화할 계획이다.

덕수궁

덕수궁

66038     2020-04-06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공지사항
※ 내용 : 실내관람시설 (2/25~별도공지시까지 휴관), 안내해설(2/8~별도 공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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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_20 한국관광 100선 ※

사적 제124호의 덕수궁은 본디 왕궁이 아니었다.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1454∼1488)의 집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왕궁이 모두 불타서 1593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선조임금은 의주로 피난갔다가 한양으로 환도한 뒤 덕수궁에서 머무른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08년 이곳 행궁에서 즉위한 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이라 고쳐부르고 7년동안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5년에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이곳에는 선왕인 선조의 계비인 인목 대비만을 유폐시켰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서궁이라 낮추어 부르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이곳 즉조당에서 즉의하고 창덕궁으로 옮긴 이후 270년 동안은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1897년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관에 있다가 환궁하면서 이곳을 다시 왕궁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다시 경운궁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규모도 다시 넓혔다. 그리고 고종 황제는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후, 왕궁을 창덕궁으로 옮긴 후에도 이곳에 거처하였는데, 이때부터 고종 황제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요즘와서는 경운궁이라는 본래의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덕수궁에서 지난 날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 18,635평의 경내에 남아 있는 것은 대한문,중화전, 광명문, 석어당, 준명당, 즉조당, 함녕전, 덕홍전 및 석조전 등에 불과하다. 덕수궁은 특히 구한말 비운의 황제 고종이 일제의 압박으로 양위를 강요당하고, 한 많은 여생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2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일제에 의해 독살당하여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져 3·1 독립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곳이다.

* 대한문 - 대한문은 현재 덕수궁의 정문이다. 이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고, 궁궐의 동문이었다. 대안문은 1906년에 다시 지으면서 '대한문' 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현판 글씨는 당시 한성부 판윤을 지냈던 남정철이 썼다.

* 광명문 - 이 문은 왕의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으로 광무 8년(1904)에 큰불이 나서 타 버린 것을 같은 해에 다시 지었다. 1938년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개관하면서 정동에 있던 홍천사의 범종과 창덕궁 보루각에 있던 자격루를 지금의 자리로 옮길 때 같이 옮겨 세웠다.

* 석조전 - 대한제국때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광무 4년(1900)에 착공하여 융희 3년(1909)에 준공한 석조 건물로,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지은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건물의 외관은 19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정면에 있는 기둥의 윗부분은 이오니아식으로 처리하고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하였다. 전체는 3층인데 1층은 접견 장소로, 반지하층은 시종인들의 대기 장소로 사용되었고, 2층에는 황제가 거처하였다. 광복 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 국립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하였다.

* 함녕전 - 보물 제 820호로 지정된 함녕전은 1897년 건축하여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건물로, 1904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을 같은해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종황제는 1919년 1월 21일 이 함녕전에서 돌아가셨다. 그 후 비어 있던 이곳에 당시에 사용하던 가구, 서화, 집기 등을 배치하여 100여년 전의 궁중 생활상을 새롭게 재현하였다.

* 중화전 -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전으로 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의 근대 국가 건설에 대한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정전 안에서 어좌(御座) 바로 위의 닫집을 보면 용을 한 쌍 볼 수 있는데 이는 정전 천정의 용과 같은 문양으로 덕수궁이 대한제국 황제의 황궁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중화전은 1902년에 중층으로 건립되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 단층으로 중건된 것이다.

* 중명전 - 중명전(重明殿)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Seredin Sabatin)의 설계로 1897년부터 1901년에 걸쳐 건립된 황실도서관이다. 지상 2층, 지하 1층의 서양식 건물로 처음에는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렀다. 2009년 12월 복원을 거쳐 2010년 8월부터 전시관(‘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곳, 덕수궁 중명전’)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 그 밖에 석어당, 준명당, 즉조당, 정관헌, 덕홍전, 보루각 자격루 등이 있다.

금산 칠백의총

금산 칠백의총

23940     2020-04-06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50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공지사항
※ 내용 : 임시휴관 (2020.02.25 ~ 2020.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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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임진왜란 때 조헌선생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병이 왜군과의 싸움에서 순절한 700 의사의 묘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선생은 의병을 일으켜 선조 25년 8월 1일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고, 18일에는 호남 순찰사인 권율장군이 이끄는 관군과 함께 금산의 적을 협공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권율장군은 왜적의 기세로 보아, 아군은 중과부적의 열세임을 탐지하고 작전을 바꾸어 기일을 늦추자는 편지를 조헌선생에게 띄웠으나 미처 받아보지 못한 채 출병한 선생의 의병부대는 필사무퇴의 결전을 벌이다가 모두 순절하였다. 조헌 선생의 제자 박정량과 전승업은 싸움이 있은 4일 후 칠백의사의 유해를 한 무덤에 모시고 칠백의총이라 했다.

그 후 선조 36년(1603)에 [중봉 조헌선생 일군순의비]를 세우고 인조 25년(1647)에는 사당 을 건립하여 칠백의사의 위패를 모셨다. 현종 4년(1663), 이 사당에 종용사라는 사액과 토지를 내렸으며 대대로 제사를 받들어 왔다. 종용사에는 칠백의사 이외에 금산 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 선생과 그 막좌 및 사졸, 그리고 횡당촌 싸움에서 순절한 변응정 선생과 무명의사 등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여 왔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종용사를 헐고 순의비를 폭파한 후 칠백의총의 토지를 강제로 팔아 경역을 황폐하게 만들어, 항일유적을 말살하였다. 광복 후 1952년에 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의총과 종용사를 다시 지었고 1970년에 묘역 을 확장한 후 종용사와 순의비를 새로 지었으며, 1976년에는 기념관을 신축하여 순절한 칠백의사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이어받게 하고 있다.

이 비각에는 중봉 조헌선생 일군 순의비의 파비가 보존되어 있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조헌선생과 승장영규대사를 따라 청주를 수복하고 금산 싸움에서 순절하기까지 행적을 쓴 것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금산 경찰서장 일본인 이씨까와 미찌오에 의하여 이 비가 폭파되었던 것을 인근 주민들이 뒷산에 묻어두었다가 8.15 해방 후에 다시 파내어 보관중 1971년 4월에 그 파비를 붙여서 다시 세우고 비각을 건립한 것이다.

* 문화재청 주관으로 매년 9월 23일 15시 제향 행사실시(칠백의총 관리소 주최)

* 주요 소장 문화재
1) 보물 제1007호(6종 7점) - 조천일기, 제문 2점, 선조대왕 교서,중봉선생 교지(조헌 문과급제 교지),전통(화살통), (조헌의병장 제수교서), 조헌 문묘배향 교서
2) 기타 유물 (8점) - 중봉전집, 항의신편 및 목각판, 심원록, 정기록,마상격문, 창살, 세독충정, 제봉문집

남원 만인의총

남원 만인의총

23734     2020-04-06

전라북도 남원시 만인로 3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공지사항
※ 내용 : 임시휴관 (2020.02.25 ~ 2020.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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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총은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 관. 군 1만여 의사들의 호국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1592)때 호남을 침범하지 못해 승리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왜군은 1597년 11만 대군으로 다시 침략, 적의 우군은 전주성을, 좌군과 수군 5만 6천은 남원성을 공략하였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해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1천여 군사와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 병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과부적으로 주민 6천여 명을 포함한 1만여 의사들은 분투 끝에 장렬하게 모두 순절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피난에서 돌아온 성민들은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1612년(광해4년) 충렬사를 건립하였다. 몇 번의 이전을 거쳐 호국선현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정부의 지원과 전 도민의 정성 어린 헌수로 1979년 정화를 마치고 충렬사에는 50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만인의총에서는 매년 9월 26일에 만인의사에 대한 제향을 올려, 그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아쿠아필드 하남

아쿠아필드 하남

0     2020-04-06

경기도 하남시 미사대로 750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공지사항
※ 내용 : 임시휴관 (2020.03.22 ~ 2020.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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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한 물소리와 하늘 빛 자연을 한 눈에 품은 아쿠아필드는 감각 있는 사람들의 오감만족 힐링 클럽이다. 하늘과 맞닿은 인피니티풀에서 느긋이 즐기고 신비로운 오로라부터 구름 위의 휴식까지 8가지 테마의 찜질스파를 경험하는 곳 들어서는 공간마다 색다른 휴식이 기다리는 아쿠아필드에서 삶의 진짜 멋과 여유를 누릴 수 있다.

<출처 : 아쿠아필드 하남>

남한산성 전통음식마을

남한산성 전통음식마을

23691     2020-04-06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31

* 산의 풍광을 즐기며 맛보는 전통음식, 남한산성 전통음식마을 *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민족사의 주요 군사요충지인 남한산성은 조선 선조에서 순조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 제16대 인조때 완공되어 300년 여의 역사를 가진 문화유산으로서 전통한옥으로 지어진 음식점에서 쌀밥, 도토리묵, 토종닭 등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다.

* 남한산성에 대하여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中部面) 산성리(山城里) 남한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축성(築城)하였다.

금오랜드 놀이동산

0     2020-04-06

경상북도 구미시 금오산로 339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공지사항
※ 내용 : 평일 임시휴장 (2020.03.09 ~ 202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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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에 위치한 금오랜드는, 꿈과 희망의 놀이동산으로 다양한 놀이기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제주맥주

1879     2020-04-06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금능농공길 62-11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공지사항
※ 내용 : 임시휴관 (2020.02.21 ~ 별도 안내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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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맥주는 30년 양조노하우를 보유한 뉴욕 No.1 크래프트맥주사 브루클린 브루어리와 15년 이상 경력의 세계 반열 브루어가 참여하여 탄생한 양조장이다. 좋은 맥주로 맥주 미식 문화를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내 최고 양조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도슨트의 안내에 따라 체험 및 내부 시설 관람을 할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아쿠아필드 고양

187     2020-04-06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대로 1955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공지사항
※ 내용 : 임시휴관 (2020.03.22 ~ 2020.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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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이 바라다보이는 고양의 가족힐링 핫 플레이스이다.클래스가 다른 찜질스파가 압권이며 루프탑풀(야외 수영장)에서는 누구나한번쯤 꿈꾸었던 로망을 만끽할 수 있다.조금 더 좋고, 조금 더 안심되는 휴식, 최고의 시설에배려를 더했다.찜질스파는 참숯방, 황토방, 불가마 등 전통 찜질룸과 미디어아트룸, 구름방등 테마형 찜질룸을 모두 구비했다. 그리고 수평선과 이어지는 듯한 환상적인 느낌의 인피니티풀이 루프탑풀의 시그니처 아이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