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청주 신채호사당 및 묘소

청주 신채호사당 및 묘소

31238     2019-06-14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길 249

* 단재 신채호를 모시는 곳, 신채호사당 *

민족사관을 정립한 사학자이며 언론인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를 모신 사당으로 1978년에 건립된 것이다. 1981년 이곳에 그의 영정을 봉안하면서 단재영당(丹齋影堂) 혹은 단재영각(丹齋影閣)으로 불린다. 영정은 한광일(韓光一)이 그린 것으로 가로 70cm, 세로 110cm이다. 입구의 외삼문(外三門)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으로 ‘精氣門(정기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나란히 놓인 3개의 석조계단 위에 ‘丹齋影閣(단재영각)’이라는 현판이 걸린 본당이 자리잡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물림집으로 마루가 깔린 통칸방에 분합문(分閤門)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다. 사당 주변에는 기와를 올린 나즈막한 담장이 둘러져 있다. 신채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옛 집터였던 사당 뒤쪽에는 그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호석이 없는 아담한 봉분 앞에 한용운(韓容雲), 오세창(吳世昌), 신백우(申伯雨) 등이 세운 묘표(墓表)와 상석(床石)을 놓았다. 상석 오른쪽에는 1972년 세운 사적비가 있고 봉분의 정면 중앙에는 명등석(明燈石) 1기,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 1쌍이 서 있다.

* 민족주의자 단재 신채호에 대하여 *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에서 출생하여 평생을 일제에 대항하여 싸우다 1929년 체포되어 1936년 2월 21일 중국의 뤼순[旅順]감옥에서 옥사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主筆)로 활약하면서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

대원사(충주)

대원사(충주)

21148     2019-06-14

충청북도 충주시 사직산12길 55

* 충주 시내에 위치한 포교사찰, 대원사 *

충주는 중원이라는 말처럼 한반도 중심에 자리한 역사ㆍ문화ㆍ교통의 요지로서, 삼국시대 접경지는 물론 수많은 애환을 가진 역사의 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이곳 중원은 예부터 철의 고장으로서 수많은 불상들이 철불로 조성되었으며, 전해지고 있다. 이로 인해 충주는 철불의 보금자리로 알려져 있으며, 충주를 찾는 이들은 어김없이 이들 철불을 친견하기를 원한다. 그 중 도심 한복판에서 충주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철불이 하나 있다. 이 불상은 용산이라는 충주의 명산에 자리한 대원사 철불로 일명 광불(狂佛)로 불리는 전설속의 불상이다. 철불은 전설 속 여진이란 노승의 모습으로, 찢어진 두 눈ㆍ험악한 인상 등에서 다소 생소한 부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으나, 이상적인 체구에 사실적인 표현은 노승의 모습을 닮은 친근한 모습이다.

대원사는 이곳에 철불을 봉안하며 창건된 도심 사찰로 충주 시가지 내 포교사찰로 알려진 곳이다. 절이 항상 산사에 있어야 제맛이지만, 일부러 절을 찾기도 하고 팍팍한 산행의 과정없이 쉽게 만날 수 있는 절 역시 현재 우리가 원하는 사찰의 모습일 것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만날 수 있는 대원사는 이런 현재 우리들의 요구를 반영한 도심속 포교소로서 철불의 보금자리일뿐 아니라 충주시민들의 상담소로서 또는 정신적인 위안처로서 충주시민들의 타는 듯한 인생의 못마름을 덜어낼 수 있는 쉼터로서 제구실을 하고 있다. 언제나 친견할 수 있는 철불, 쉽게 찾을 수 있는 사찰에서 우린 고개를 뻣뻣이 드는 것도 숙이는 것도 조심스러운 세상에, 법당 마루에 무릎을 끊고 머리를 조아리며, 가식의 옷을 벗어 던진 나를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온화한 미소는 아니지만 인간의 모습을 가진 철불을 향해 안으로 나를 참구해도 그만이고 남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조성당시에도 그랬듯이 현재에도 무뚝뚝한 철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기를 기도해 본다.

* 대원사의 창건 경위와 역사 *

대원사 경내에 있는 ‘우암승현선사지비(愚岩勝鉉禪師之碑)’라 음각된 비석 뒷면에 1929년 9월에 김추월(金秋月) 선사( 禪師)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929년 이후 포교당으로 운영되다가 충주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로 성장하였다. 1994년 화재로 대웅전 일부와 충주 철불좌상을 봉안했던 보호각이 소실되었으나 1998년 극락전을 새로 지어 충주 철불좌상을 안치하였다. 1994년 화재 이후 당시 주지였던 현덕에 의해 주불인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 및 후불탱화가 조성되었으며, 대원 어린이집도 당시 개원되었다. 이후 보호각 없이 대웅전 앞에 방치된 충주철불좌상의 봉안을 위해 1998년 승려 법광이 극락전을 건립하고 후불탱화를 조성하였다.

[충주 철조여래좌상] 보물 제98호(1963년 01월 21일 지정)

철로 만든 불상으로 단호사 철불좌상과 같은 양식이지만 엄격미가 강조된 점이 특징이다. 삼각형에 가까운 얼굴, 길고 넓은 눈, 꽉 다문 입가로 내려오는 팔자형의 주름이 근엄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좌우대칭을 지키면서 기하학적 옷주름 선을 규칙적으로 표현하였다.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 초기에 걸쳐 유행하던 철로 만들어진 불상 가운데 하나이다. 도식화된 표현으로 볼 때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대포해수욕장

다대포해수욕장

64700     2019-06-13

부산광역시 사하구 몰운대1길 14
051-207-6041

* 2019 해수욕장 개장정보 *
- 기간: 7.1.~8.31.
- 시간: 09:00~18:00

* 완만한 수심과 모래사장으로 가족단위 피서객이 많이 찾는 곳, 다대포해수욕장 *
부산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약 8km 거리에 있는 해수욕장이다. 백사장 길이 900m, 폭 100m에 평균수온 21.6℃의 조건을 갖추었다. 낙동강 상류에서 실려온 양질의 모래밭과 완만한 경사, 얕은 수심과 따뜻한 수온으로 널리 알려진 피서지이다. 민박이나 야영이 안 되는 곳으로 주변에 숙박과 식당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해안에서 300m 거리의 바다까지도 수심이 1.5m 안팎이어서 가족단위의 피서지로 적합하다. 1987년 낙동강 하굿둑이 준공되면서 강물의 유입이 막혀 해수욕장의 기능이 예전만 못해졌기 때문에 하굿둑에서 낚시를 하거나 간조 때 해수욕장 모래밭에서 소라나 게를 잡으려는 관광객이 더 많이 찾는다.

* 다대포해수욕장의 또다른 볼거리, 다대포 낙조분수 *
‘다대포 꿈의 낙조분수’는 다대포해수욕장 입구 2519m²의 광장에 분수 원형지름 60m, 최대 물높이 55m, 물 분사 노즐수 1046개, 조명 511개, 소분수 24개 등 세계 최대 규모를 갖추고 있다. 세계의 유명 분수들이 대부분 호수 안 또는 벽면에 설치됐지만 이처럼 바닥분수로 음악과 조명이 어우러진 장관을 연출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다대포의 낙조분수는 이미 한국기록원으로부터 국내 최대 규모의 분수대로 정식인증을 받았다. 이제는 세계 기네스북 등재를 신청해놓은 상태이다. 매년 3월부터 11월까지 운영되는 다대포 낙조분수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여 좀 더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계절별, 테마별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놓았다. 물론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 분수 쇼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볼거리가 되지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분수 쇼와 더불어 좋은 추억거리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다.

대천한내돌다리

대천한내돌다리

24310     2019-06-13

충청남도 보령시 동대동

대천천 하류에 있었던 다리로, 예전에는 남포와 보령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였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물살에 쓸려 떠내려 가거나, 하천 제방공사를 하면서 파손되어 얼마남지 않은 것을, 1978년 수습하여 옮겨 두었다가, 1992년에 대천천 강변에 옮겨 일부만 복원해 놓았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근처에 있는 왕대산의 돌을 깎아내어 뗏목으로 운반해 온 것으로 보인다. 다리의 몸체를 받치는 기둥은 거칠게 손질한 2∼3개의 돌을 쌓아 이루게 하여, 모두 6개의 기둥이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 위로 넓적한 판돌을 걸쳐서 다리를 완성하였는데, 원래는 12칸 돌다리라 하나 적어도 22칸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리의 높이는 낮은 편이어서 바닷물이 밀려오거나 홍수가 질 때면 물에 잠기고, 보통 때에도 가끔 잠기었다 한다.『동국여지지』,『신안읍지』,『여지도서』등의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18세기에는 이 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령에서는 해마다 향토문화축제가 열리는데 이 때 12칸 돌다리밟기제(祭)와 돌다리밟기에 많은 시민이 참여하고 있다.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개소

안심사(청원)

35178     2019-06-14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사동길 169-28

* 신라 진표율사가 창건한 고찰, 안심사 *

안심사는 구룡산 서쪽 기슭의 사동리 절골에 소재한 조계종에 속한 고찰이다. 대웅전 안에 1982년경까지 걸려있던 [안심사고적연대표]에 의하면 신라 혜공왕 11년(775)에 진표율사가 절을 짓고 그의 제자 수십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안심사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고려 충숙왕 12년 (1325)에 원명국사가 중창하고 조선 인조 4년(1626)에 松庵大師가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찰 내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의 연대와 대략 일치하고 있다. 또 대웅전의 처마끝에 장식된 암막새기와에 姜熙十一年壬子五月日造瓦大施主···라는 陽刻銘文이 있어서 창건된지 60년 후인 조선 현종 13년(1672)에도 飜瓦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근래에는 1980년과 1989년에 飜瓦와 단청 공사가 있었고 1984년에 요사를 신축하였다. 그러나 안심사에 대한 문헌의 기록은 없고 조선 후기의 각종 지리서에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安心寺在州西南二十五里
安心寺自官門南距四十里編戶五戶男五口女二口
安心寺在州西南二十五里
安心寺在州西南二十里
安心寺在州西南二十五里
安心寺在八奉山

이밖에 여지도서의 [청주목지도]와 순조22년(1882)경에 필사한 여지도의 [거원지도]에 안심사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료로써 보면 안심사는 비록 <동국여지승람>에는 보이지 않지만 조선시대에 계속하여 法燈이 이어진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안심사에 있는 다양한 문화재 *

영산전(충북유형문화재 112)은 1613년에 창건하였다가 풍상으로 퇴락해가는 것을 1842년(현종 8)에 중수하였다. 본디 이 건물은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는 비로전이었으나 나한전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영산전이 되었다. 안에는 석가삼존불, 16나한상, 영산후불탱화, 신중탱화, 나한도 4점, 법고, 괘불함 등이 있다. 영산전 불단 앞에 마련된 괘불함에는 1652년(효종 3)에 제작한 괘불(국보 297)이 보관되어 있다. 이 괘불은 석가여래상을 주존으로 주위에 불보살과 제자·성중 및 사천왕의 호법신들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이다. 크기는 가로 462cm, 세로 627cm이며 그림의 중앙에 그려진 본존상의 높이는 372cm에 이른다. 충혼각은 6·25전쟁 때 죽은 무명용사들을 위해 인근 부대에서 세웠으며 매년 현충일에 위령제를 지낸다. 이밖에 세존사리탑(충북유형문화재 27)과 세존사리비, 신라시대의 석조여래좌상, 목판 다라니경, 석탑 부재 등이 있다. 세존사리탑은 진표가 창건 당시 석가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조선 말에 탑의 행방이 묘연하던 차에 구룡산에서 발견되어 1881년(고종 18)에 구천동으로 옮긴 뒤 1900년(광무 4)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문화재]
1)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 (국보 제 297호)
2) 안심사 대웅전 (보물 664호)
3) 안심사 괘불 (충북 유형문화재 51호)
4) 안심사 세존사리탑 (충북 유형문화재 27호)
5) 안심사 비로전 (충북 유형문화재 112호)

단호사(충주)

21477     2019-06-14

충청북도 충주시 충원대로 201

* 단호사철불을 봉안하고 있는 곳, 단호사 *

어느 위치에 어느 규모의 어떤 사찰을 찾아 가더라도 그 사찰이 가지는 매력이 있다. 충주에 있는 철불좌상. 아마 고려ㆍ조선을 통틀어 철불의 수를 손가락으로 꼽으라면 꼽을 정도지만 유난히 그 철불들이 많은 지방이 바로 충주다. 삼국시대부터 철의 주산지이며, 중부내륙의 교통의 중심지, 그리고 지방호적의 고향이던 충주에는 유난히 생김새가 특이한 지방색이 강한 매력적인 철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단호사는 바로 충주 철불의 대표작인 단호사철불이 봉안되어 있는 매력적인 곳으로 누구나 한번쯤 들리는 중요한 답사지이다.단호사를 찾아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수안보로 가는 충주 우회도로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대로변에 있는 절. 울창한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용처럼 굼실되는 소나무가 지나가는 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곳에 가면 철불이 있는지, 사전지식이 없더라도 충주호를 구경하기 위해 지나는 길에 아름드리 나무와 소나무로 인해 잠시 들리는 곳. 그곳이 바로 단호사이다. 소나무가 땅바닥에 굼실대는 용처럼 서 있고, 절을 뒤덮을 듯 우거진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절의 옛스러움을 더해준다. 철불은 바로 이곳 경내 대웅전에 자리하고 있다. 살이 두둑한 얼굴에 길고 눈꼬리가 올라간 눈을 거의 감은 듯 내리뜬 모습은"야 오든지 가든지…"하는 듯 성이 난 표정이다. 시간을 두고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얼굴이 바로 현세를 사는 우리들의 지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삼국시대 중앙이라는 관료체제에 지배 당하며 복종을 강요받던 그이들이 만든 불상. 그 얼굴에는 당시 그이들의 고난과 역경이 스며들어 녹아 있는 것이 아닐까.

* 단호사의 창건 배경과 걸어온 길 *

단호사의 창건 연대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조선 숙종 때 중건한 후 사찰 이름을 약사(藥寺)라고 개명하였으며, 1954년 겨울에 단호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대웅전의 단호사 철불좌상(鐵佛坐像)과 충주 단호사 삼층석탑 등의 유물들을 통해 처음 설립된 시기가 고려시대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볼 수 있지만, 단호사 철불좌상이 봉안되었던 원래의 위치를 알 수 없어 창건 연대가 불확실하다. 최근에 창건된 대웅전은 약 28평 규모의 다포식 건물로, 단호사 철불좌상이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으며, 왼쪽에는 대세지보살과 지장보살이, 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이 각각 봉안되어 있다. 경내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500여 년의 노송이 있는데, 높이는 8.5m이고 나무 둘레는 2.1m이다.

백운암(충주)

18494     2019-06-14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내창로 617-80

* 철불좌상으로 유명한 사찰, 백운암 *

빌미산 백운암(白雲庵)은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 위치한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조선 후기 왕실의 무녀인 진령군(眞靈君) 여대감(女大監)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1886년 진령군이 인법당(因法堂)을 지은 이후 법당과 요사를 함께 사용하다가, 1977년 요사를 두어 법당과 요사를 분리하고 법당을 대웅전으로 편액하였다. 1991년에는 삼성각을 짓고 요사를 수리하여 현재의 가람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1999년 주지 진송(眞松)이 국비를 지원받아 대웅전을 재건하였고, 2002년 축대 보수는 물론 도로 공사를 통해 비포장길이었던 사찰의 진입로를 보수하였다. 백운암(白雲庵)에는 철제불상이 본존불로 안치되어 있는데, 단호사 철불좌상 및 대원사 철불좌상과 함께 충주의 뛰어난 철불좌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철불상은 지금까지도 개금불사하여(황금색으로 표면을 칠한 것) 철불상 본래의 모습은 볼 수 없으나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춘 훌륭한 불상이다.

또한, 철불상은 충주시 대원사와 단호사에 있는 철불상과는 그 형체나 조각수법을 전혀 달리하고 있다. 철불상의 모양을 살펴보면 나발의 머리엔 큼직한 육계가 있고 상호는 원만하여 위엄과 자비가 넘친다. 우견편단의 법의는 가슴속으로 부터 무릎에 이르기까지 평행 원호를 그리면서 흘렀고 양 무릎을 자연스럽게 덮고 있으며, 두손을 자연스럽게 양쪽 무릎에 놓았다. 고려시대 12세기경의 우수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앉은 높이 90cm, 어깨폭 40cm, 가슴폭 70cm이다. 이 암자에는 또한 반자가 있으니 바라라고 불려지는 징 같이 생긴 종의 일종이다. 직경 43cm, 두께폭 10cm인데 장식으로는 5개의 연과를 가진 자방이 있고 그 주변에 12판의 연화문을 돌렸으며 그 밖으로 3줄의 돌기선을 그었다.

* 백운암 철불상에 얽힌 전설 *

철불좌상에는 설화가 전해온다.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왕후가 충주지방으로 피신을 왔을 때 한 무당이 곧 환궁하게 될 것을 예언했는데 예언대로 곧 환궁하게 되자 무당을 서울로 불러 진령군여대감의 벼슬을 내렸다. 하루는 이 여대감의 꿈에 백의철불이 나타나 지금 이 사지에 안치해 달라고 하므로 그 자리에 절을 건립하여 백운암이라 하게 되었다 한다. 그후 이 절은 중창되었는데 법당은 1977년에 완공하여 지금의 모습을 하였으며 주존불로 안치된 불상이 쇠로 된 철불좌상으로 전면에 금칠을 하고 있다.

백족사(충북)

19954     2019-06-14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은행상야로 441-122

* 세조 임금에 얽힌 일화가 있는 사찰, 백족사 *

백족사는 청주시 백족산에 자리한 태고종 소속 사찰이다. 산의 이름이 백족산이라고 불리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하고 있는데 그 중 조선초 세조와 관련된 설화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초에 세조 임금께서 속리산에 기도드리러 가는데 이곳을 지났다고 한다. 백족산에는 예부터 유명한 영천이 있어서 세조 임금께서 이곳에 발을 담그고 길고 긴 여행의 피로를 풀고자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잠깐 발을 담근 임금의 발이 갑자기 하얗게 변해버렸고 이로 인해 산 이름을 백족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백족산은 나지막한 산이기도 하며 등산로가 잘 꾸며져 있어 많은 사람들의 등산코스로 각광받고 있는 산이다. 백족산 입구에서 백족사를 지나 정상을 통해 미륵사, 공무원연구원으로 이루어진 등산로는 약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며 곳곳에 휴게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편하게 등산을 즐길 수 있다.

* 백족사에 전하는 이야기 *

현재 백족사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좌상과 석탑이 전해지고 있다. 분명 고려시대에 사찰이 경영된 것을 알 수 있으나 그 자세한 내막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또한 조선조에도 사찰이 경영되고 있었음을 조선중기의 학자인 이안눌(李安訥:1571~1637)의 문집인 “동악선생집(東岳先生集)”에서 확인 할 수 있으나 이외에 더 자세한 사찰의 내막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사찰은 조선후기 어느 순간 폐사가 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사찰의 역사를 잇기 시작한 것이다. 사찰의 역사를 잇게 된 사연이 또한 사내에 전하고 있다. 1920년대에 청주가 고향인 송씨가 일본에 가서 살고 있을 때였다. 나이가 40이 넘었는데도 자식이 없어 항상 걱정이었는데 어느 날 꿈에 고향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한다. 꿈에서 고향의 백족산을 거닐고 있는데 이때 산신령이 나타나 “나는 백족산 산신령이다. 지금 저 쓰러진 법당 속에 부처님이 파묻혀 계시니 네가 부처님을 구해주면 네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하였다 한다.

꿈을 깨어 급히 고향으로 돌아와 백족산으로 향하니 거기에는 실제로 쓰러진 법당이 있었고 잔해 사이에 돌부처가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이에 그는 정성으로 초옥을 지어 이곳에 돌부처를 모시고 정성들여 기도한 후 결국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 뒤로 백족사의 석불에게 소원을 빌면 자식을 점지해 준다는 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실제로 영험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백족산 등산로를 따라 한참을 오르면 백족사 근처에 넓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백족사에서 운영하는 납골공원이다. 근래에 새롭게 조선의 전통적인 장례풍속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염려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대안으로 납골공원이 부각되고 있다. 이런 납골공원의 선구적인 사례가 백족사에 있는 것이다. 백족사에는 뛰어난 석조의 성보가 많다. 이들 중 현재 석불좌상과 석탑을 문화재로 등록하고자 하고 있다. 석불좌상과 석탑 모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인정되고 있는 만큼 문화재 등록에는 그리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다만 현재까지 어렵게 전해져 오며 많은 부분이 마모되고 파손된 만큼 앞으로도 지금의 형상 그대로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복천암(청주)

19385     2019-06-14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교동로71번길 120

* 허공심보살의 이야기가 있는 곳, 복천암 *

복천암(福泉庵)은 충북 청주시 상당구에 자리한 한국불교태고종 소속 사찰이다. 남들이 터부시하는 무속인의 삶을 살아야만 했던 젊은 아낙이 있었다. 그녀는 우암산 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아는소리’를 해서 “신장보살”이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그러나 남들의 고민을 속 시원히 풀어주는 그녀였지만 자신의 소원은 정작 이룰 수 없어 고심을 하였다. 그녀의 소원은 절다운 절을 세워 제대로 수행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껏 일심사라는 이름으로 사찰을 짓고 살아왔지만 속은 여전히 신(神)을 모시는 무녀(巫女)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세월은 흘러 젊은 아낙은 할머니가 되었고, 세상과 이별할 날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비구니스님을 보게 되었다. 청초하면서도 서릿발 같은 기개가 엿보이는 스님이었다. 늙은 무녀는 이 비구니스님에게 자신이 평생토록 가슴에 지녀온 뜻을 이야기 하고 훌륭한 불사를 이루어 줄 것을 당부했다. 그 뒤 늙은 무녀는 아들의 등에 업혀 반평생을 살아온 절을 떠나 속세로 내려가고 말았다. 자신이 평생 품은 뜻을 세워줄 스님을 만났다는 위안이 있어서일까? 이 무녀를 사람들은 허공심보살이라 했다.

* 복천암의 유래 *

허공심보살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비구니스님은 혜근 스님이다. 어려운 시기 절을 맡게 된 혜근스님은 손수 벽돌을 찍으며 가람을 일구었다. 그러기를 30여 년, 허공심보살의 간절한 염원은 마침내 이루어져 사찰은 여법하게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도량으로 변모를 하였으니 그곳이 바로 지금의 복천암(福泉庵)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과 같이 한 무녀의 오랜 염원은 그렇게 혜근 비구니 스님을 통해 이루어 진 것이다. 우암산(牛岩山, 338m) 등산로 가운데 KBS 송신탑을 향해 난 길은 계곡이나 바위 등 자연물에 깃든 신령을 숭배하며 치성을 드리려는 무속인들의 출입이 잦은 곳으로, 1928년 강신무인 ‘허공심’이 당집을 지은 것이 복천암의 유래다.

청계서원

3883     2019-06-13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청계서원은 1833년(순조 33)에 건립되었으며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은열공(殷烈公) 정신열(鄭臣烈)과, 고려 말 물레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木棉, 목화) 옷을 입게 한 문충공(文忠公) 정천익(鄭天益)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이다. 두 분은 각각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다. 본래 대평면 마동에 건립되었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된 것을 1961년에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였다. 1961년 후손들이 이곳에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경덕사와 정교당을 건립, 봉남서당이란 이름으로 그 맥을 이어오다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숭은사와 진사청을 재건, 청계서원으로 복원되어 매년 음력 3월 15일 사당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조해영가옥

16686     2019-06-13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수동길 8

조해영가옥은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에 있는 고가이며 1986년 9월 8일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안채 1동과 별채 1동 그리고 변형된 문간채만 남아 있다. 안채는 상량문에 ‘대정(大正)7년’이라 명기되어 있어 1918년에 건축된 것으로 보여진다. 별채는 안채보다 조금 늦은 1922년 또는 그보다 조금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가옥은 정남향에 가까운 남남서향이며 건물들의 전체적인 배치는 알 수 없다. 안채와 별채는 모두 남북으로 길게 서로 평행하게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남쪽으로, 별채는 서쪽으로 향해 자리 잡고 있다. 안채의 난간은 상당히 훼손되었으며 모든 건물의 기와가 퇴락하였다. 또 일부 건물은 누수공사가 필요한 곳도 있어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매우 나쁘다. 안채와 별채가 둘러싸인 공간을 제외하고는 뒷담이 없이 거의 텃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원래의 대문은 없어지고 좁은 문이 남아 있는데, 보존상태가 불량하다. 별채 동편 울타리 밖으로 가까이에는 김육(金堉)의 선정비가 있다. 울 안에는 한말 사람의 것으로 추측되는 비 2개가 가로 놓여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이 근방에 비석군(碑石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조해영가옥에서 아름다운 ‘꽃담’을 만나다 *

조해영가옥의 대문채 안쪽으로는 화려한 담장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 새롭게 보수한 담장이 ‘ㄱ’자로 꺾여 있다. 담장은 붉은 벽돌로 쌓고 그 중앙에 화려한 그림을 그려 넣었다. 네모나게 흰 회칠을 하고 돋아나게 그린 그림 속으로 학, 사슴, 구름, 연꽃과 산삼 등 십장생이 보인다. 그 뒤쪽에 소담스런 항아리가 엉덩이를 붙이고 백년 가까이 버티고 있다. 담장 뒤로 돌아가면 그림이 있는 부분을 돌로 쌓아둔 것이 보인다. 담장의 구조로 보아 집을 지을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담장은 단순한 담장이 아니라 대문을 들어서 만나는 바람벽의 기능을 갖고 있기도 하다.

김안균가옥

16649     2019-06-13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수동길 20

* 일제강점기 가옥 ‘김안균가옥’ *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에 있는 김안균가옥은 1986년 9월 8일에 전라북도민속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이 가옥은 대지 2,318평, 건평 188평의 규모로 상량문에 의하면 안채와 사랑채는 1922년에, 동·서 행랑채는 1930년대에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 전통적인 상류가옥의 변모를 보여주며 조선 말기 양반가옥 형식을 기본으로 구조와 의장에 일본식 수법이 가미되었다. 서양식으로 거실과 침실을 구별하였고, 사랑채와 안채 앞뒤로 복도를 두르고 유리문을 달아 채광을 조절하였다. 세면대가 딸린 화장실이 사랑채 옆에 자리하고, 행랑채 끝에는 목욕탕을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나 부연 밖으로 함석차양을 달았다. 대청은 누마루 형식으로 정교한 아자(亞字) 난간을 둘렀으며, 주춧돌은 정교하게 잘라낸 희고 매끄러운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정문(旌門)은 행랑채 끝에 자리한다. 또 곳간은 정면에 기둥을 세워 지붕을 연결한 포치 형식으로 바닥에 시멘트를 발라서 통로로 이용하였다. 뒤쪽 집들을 사들여 점차 넓힌 탓에 건물이 넓은 대지에 비해 앞쪽으로 몰려 있다.

* 전통적(傳統的)인 상류가옥 ‘김안균가옥’ *

이 집의 건축 년대는 오래되지 않으나 규모를 보면 전북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가옥이다. 규모뿐만 아니라 사용된 하나 하나의 부재나 그것을 깎고 다듬는 데 드린 공력면에서도 온갖 사치(奢侈)를 다한 가옥으로 이만큼 재력이 투입된 가옥도 전국에서 그 예를 찾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또 이 가옥이 1920년대에 지어진 만큼 우리나라의 전통적(傳統的)인 상류가옥이 이 무렵에 어떻게 변천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면에서도 강릉의 선교장(船橋狀)과 더불어 좋은 예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