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남원 교룡산성

남원 교룡산성

18688     2020-09-24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교룡산성은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성곽으로 백제시대 최초 축조된 것으로 알려지는 산성이다. 남원시 산곡동 교룡산(518m)에 있다. 교룡산성은 백제가 신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확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남원지역이 백제권역인 데다가 축성기법에 미뤄 짐작할 뿐이다. 돌로 쌓은 이 산성은 총 둘레가 3,120m이다. 고려말과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와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성내에는 685년(신문왕 5) 창건된 선국사가 있다. 교룡산성은 전북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산성 일대는 교룡산국민관광지로 남원시민들이 많이 찾는다.

백산서원

백산서원

15673     2020-09-24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북리길 40

현내리 진양하씨(晉陽河氏) 문중 5명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조선 세종 때 삼정승을 두루 거친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을 비롯하여 사양재(四養齋) 하위국(河衛國)의 네 아들인 하징도(河徵道)·하정도(河呈道)·하형도(河亨道)·하현도(河顯道) 등을 배향하고 있다. 1821년(순조 21) 타진사(妥眞祠)라는 사액서원으로 창건되었다가 1869년(고종 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 헐렸으나 1917년에 후손들이 다시 건물을 짓고 백산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경내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백산사(栢山祠)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타진사, 정면 4칸, 측면 1칸의 우진각지붕으로 된 강당과 내삼문, 고직사가 있다. 이 중 타진사에 있는 문효공과 정경부인영정(전북유형문화재 81)은 1428년(세종 10) 하연의 셋째 아들 하우명의 작품이라고 하며 부본이 일본 오사카[大阪] 센리대학[千里大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보호구역의 면적은 1,025㎡이며, 진양하씨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23380     2020-09-24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길 90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진도를 찾아가는 길은 예전에 광주, 나주, 영암, 해남을 거쳐 돌아가야 했으나, 지금은 목포에서 해남읍내를 거치지 않고 영암방조제와 금호방조제를 가로질러 진도에 갈 수 있게끔 길이 단축되었다. 유인도 45개와 무인도 185개로 이뤄진 진도의 호국 전적지로는 섬 동북쪽에 들어선 벽파진의 이충무공전첩비와 용장산성, 그리고 남쪽의 남도석성이 있다. 진도대교를 건너 읍내로 가다보면 군내면 세등리를 지나 용장산성 안내판이 나타난다. 이를 따라 좌회전,1.7km를 가면 용장산성 입구인데, 벽파진은 이 곳에서 계속 바다를 향해 3.5km 가량 간다.

벽파진은 옛날부터 진도의 관문 구실을 했던 나루터로 명량해협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 바다 건너편은 해남군 황산면 땅이다. 포구 뒷편 암산에 오르면 이충무공전첩비가 우뚝 서 있다.1956년에 세워진 이 비에는 이은상 선생이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이더니라."이 싯귀가 벽파진의 이충무공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다.전첩비로 오르는 계단 왼쪽에 비를 세운 내력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정유재란때 이순신장군은 12척의 함선으로 명량해협 (울돌목)에서 3백여 척의 왜선을 섬멸, 유명한 명량대첩(1597)을 거둔다.

벽파진은 바로 그 명량대첩을 거두기 직전 16일 동안 이순신이 머물면서 나라의 미래와 백성의 안위를 고민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작전을 숙고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비석의 높이는 11m이며 커다란 돌거북 등 위에 얹혀 있으면서 명량해협을 굽어보고 있다. 이곳에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으면 고려 삼별초의 근거지였던 용장산성 행궁터가 나온다. 용장산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이곳에서 몽고군에 맞서 싸우다 남도석성으로 밀려가고 끝내는 제주도로 건너간다.벽파진은 지금도 항구로서의 기능을 발휘, 목포와 제주를 오가는 배가 하루에 한번씩 기항한다.

부여금사리성당

부여금사리성당

0     2020-09-24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성충로1342번길 21

부여 금사리성당은 대전교구 소속의 가톨릭 교회로 1901년 4월 27일 공주 본당에서 분리 설립된 부여 최초의 성당이다. 설립 당시에는 '홍산 성당' 또는 '소양리 성당'이라고 불렀다. 초대 신부인 프랑스 사제 공베르 쥘리앵 신부는 소양리에 터를 잡고 가옥 3동과 논, 대지 등을 매입하여 교회 신축 공사를 진행하여 1906년 4월에 완공하였다. 이후 1913년 9월 2일에는 사제관과 사랑채를 완공하고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부여 금사리성당의 본당은 유럽 성당의 건축 기본 양식인 바실리카형 평면으로 되어 있다. 현재는 본당과 사제관 2동 만이 남아있다. 본당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본래 건물의 앞면에 종탑이 있었으나 강풍으로 넘어져 지금은 종을 치던 구멍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 초기의 성당 형태를 잘 보여주는 부여 금사리성당은 1998년 7월 25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부여 반교마을

부여 반교마을

0     2020-09-24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반교동로 9-8

반교마을은 나주 정씨가 정착하여 형성된 마을로 향촌의 정서와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마을에 배나무가 많아서 배나무골이라고 불렀으며, 돌이 많아 도팍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반교마을은 아미산의 중산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의 동쪽으로는 반교천이 흐른다. 널로 만든 다리를 사용한다고 하여 판교라는 이름으로 부르다가 지금의 '반교'라는 지명이 자리잡았다. 반교마을은 마을 전체가 돌담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등록문화재 제280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는 '부여 반교마을 옛 담장'은 충청도에서 유일하게 지정된 돌담길 문화재이다.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연석 막돌을 사용하여 쌓은 이 담장은 하부가 약 90cm로 넓고, 위로 갈수록 조금씩 좁아져 안정감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기 위한 방풍담이라 다른 마을보다 담장이 높은 편이다. 전 문화재청장인 유홍준교수가 머문다는 휴휴당도 이 마을에서 만나볼 수 있다.

남원성

17196     2020-09-24

전라북도 남원시 동충동

조선시대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읍성이다. 남원시 동충동에 있다. 본래 남원성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691년(신문왕 11) 쌓은 성이다. 현재의 것은 1597년 선조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리하여 크게 쌓은 것이다. 군사뿐만 아니라 행정 기능도 담당하는 성으로 일반적인 성의 양식과 달리 성곽이 장방형을 띠고 있다. 성곽의 둘레는 2.4km에 달하고, 성벽의 평균 높이가 4m이다. 사방에 성문이 있었고 그 중 남문이 가장 컸다. 성내에는 70여 개의 우물이 있었다. 남원시 향교동에 만인의총이 있는데,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 의해 전사한 군인과 민간인의 무덤이다. 남원성은 사적 제298호로 지정되어 있다.

미륵암석불

14857     2020-09-24

전라북도 남원시 시묘길 24-35

* 통일신라 도선스님이 세운 암자 *

미륵암은 전라북도 남원시 노암동 765-1번지에 자리한 한국불교태고종 사찰이며 석불은 미륵암내에 있는 전체 높이 192㎝의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솟아 있다. 목에는 3줄로 새겨진 삼도(三道)가 있고, 불상 뒤편에는 배(舟)모양의 광배(光背)가 있다. 지금은 왼쪽 윗부분과 오른쪽의 1/3 정도가 절단되어 없어졌으며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불상이 서 있는 받침돌은 사각형으로 화강암을 이용하여 만들었으며 그 위에 다시 연꽃잎이 아래로 향한 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불상의 발 부분이 표현되지 않아 불상과 받침돌이 별개의 돌처럼 느껴진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상의 높이가 192cm, 견폭 65cm, 두고 49cm, 광배 폭 155cm의 형태로 되어 있다.

* 둥근 얼굴의 온화한 모습 *

이 불상은 서있는 부처와 그 둘레에 서린 빛을 하나의 돌에 조각한 것으로, 미륵암은 통일신라 말기 도선스님이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라졌으며, 불상을 모신 이 건물은 1927년 불교와 문화재에 뜻이 있는 마을사람들이 지었다. 불상이 마모가 심해 자세한 모습은 불분명하지만, 두리 뭉실한 머리 윤곽에 얼굴은 둥글어 온화한 모습이다. 부처의 몸에서 발하는 빛을 나타낸 부분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비해 신체의 높이가 매우 작아 균형감이 떨어진다.

화산사

16122     2020-09-24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화산길 24-21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화음리에 있으며 1984년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34호로 지정되었다. 화산사(華山祠)에는 박수기(朴秀基), 박상(朴祥), 조선 전기의 문신 김정(金淨), 박지견(朴枝堅), 박정(朴渟), 육유정(六柳亭), 박지효(朴之孝) 등이 배향되고 있다. 이 사우는 이곳에 배향하고 있는 분들의 절의와 진충보국정신을 높이 받들고 길이 후손에게 거울을 삼게 하고자 건립된 것으로서, 이곳 유림들이 주동이 되고,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협조를 얻어 건립하였다. 눌재 박상 선생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연산군 2년(1496)에 진사가 되었고, 1505년 전라도사를 지냈다. 중종 6년(1511)에는 담양부사가 되었으며, 1515년에는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1526년에는 문과중시에 장원하였으며 1529년에는 병으로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저서로는 [눌재집]이 있고 시호는 문간이다. 충암 김정 선생은 조선 전기 문신이며 학자이다. 중종 2년(1507)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1514년에는 순창군수가 되었다. 눌재 박상과 함께 중종이 왕후 신씨를 폐출한 처사가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였다. 김정 선생은 시문과 그림에 능하였으며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개혁정치를 펼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충암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이다. 1961년 세운이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적상산성 호국사비

16878     2020-09-24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산성로 1050

* 적상산성과 호국사 내력 알 수 있는 비석

적상산성 내 안국사 경내 남쪽 축대 아래 있는 호국사비(護國寺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5호)는 적상산성과 관계된 기록을 비교적 상세히 담고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이다. 현재는 글씨가 마모되어 거의 알아 볼 수 없고, 1898년(고종 35) 간행된 <적성지(赤城誌)> 고적조(古迹條)에 비문의 전문이 게재되어 있다.1643년(인조 21) 이조판서 겸 대제학인 이식(李植)이 왕명으로 사고를 순찰하고, 정축란 이후 문란해진 사고의 관리와 성내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왕에게 진상(秦上)하여 1645년 호국사를 창건하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호국사는 적상산성 안에 있는 사고(史庫)의 수호를 위한 승병들의 숙소로 1910년 경술국치로 사고가 폐지될 때까지 호국의 도량이었다. 1949년 여순사건 때 소실됐다.

대리석으로 만든 이 비는 이면비(二面碑)로 전체의 높이가 1.78m이다. 장방형 농대석(籠臺石)은 사면에 안상(眼像)을 배치하고 좌우에 운문(雲을紋) 조각했으며, 중앙에는 4개의 여의두문(如意頭紋)을 조각 돌출시켰고 상두면은 복연(伏蓮)을 새겨 장식했다. 이 농대는 높이27㎝, 정면폭 82㎝, 측면폭 47㎝이다. 농대 위의 비신(碑身)은 상단에 ‘적상산성호국사비(赤裳山城護國寺碑)’라는 두전(頭篆)이 각자되어 있고 그 아래로 본문을 새겼는데 높이는 1m, 폭 59㎝, 두께 17㎝이다. 뒷면에는 ‘순치 2년 10월 일건(順治 二年 十月 日建)’이라 새겼다. 비신 위에 올려놓은 이수(離首)에는 4면에 용틀임을 조형한 반용(蟠龍)을 조각해 놓았다. 이수의 높이는 51㎝, 폭 82㎝, 두께 37㎝이다.

고홍건신도비

14789     2020-09-24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길 138

*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의 행적을 기록하여 새긴 비 *

거북과 용머리를 새긴 이 비는 조선 현종 9년(1668)에 세운 것이다. 신도비란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의 행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이나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우는 비이다. 고흥건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공신록에 이름이 오른 고희의 아들로, 조선 선조 13년(1580)에 출생 하였으며,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 왕을 호위한 공으로 호성원종공신에 이름이 오른 사람이다. 고흥건의 자는 입부이고 본관은 제주이다. 그는 호성공신 영성군 고희의 큰 아들로 선조 13년에 태어났다. 그는 선조 36년(1603)에 무과에 급제 수문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아버지 영성군의 공적으로 말미암아 영원군에게 습작하였고, 뒤에 찬화사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의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그는 이때 장단부사로 있었는데 자원하여 서문협 수장을 하였다. 이때의 공으로 충청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다. 그 뒤에 자헌대부로 승진되었고, 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향년 76세로 죽었다.

* 용두귀부의 절묘한 솜씨는 대표적인 걸작으로 평가 *

1668년 세워진 고흥건신도비는 지방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용두귀부의 절묘한 솜씨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당대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고,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111호로 지정 되었다. 고흥건 신도비를 지나면 두채의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영성군 고희장군 사적문과 효충사이다. 효충사는 고희장군의 위패를 모신 목으로 유림에 의하여 매월 3월 22일에는 의례를 행하고 앞쪽건물은 재주 고씨 문중의 문중유물이 372년(1522-1894)에 걸친 다양한 유품이 전시되는 곳으로 20여종에 이르는 총215종이 일괄 보물 739호로 지정되어있다.

내소사삼층석탑

17160     2020-09-24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내소사로 243

* 신라의 전형을 충실히 따른 고려시대 탑 *

내소사 대웅전 앞에 서 있는 3층 석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판형(板形)의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2중 기단을 세웠다. 낮은 하층 기단은 저석과 중석을 하나의 돌로 하여 새겼는데 4매의 돌을 엮어 구성하였다. 하층 기단의 중석은 2개의 우주(隅柱)와 1개의 당주(撑)가 새겨져 있다. 하층 기단의 갑석은 2매의 돌을 동서 방향으로 나누어 구성하였는데, 낙수면이 급하고 상층 기단을 받치기 위한 2개의 테두리장식이 새겨져 있다.

* 파손이 심하여 원형을 잃고 있는 옥개석 *

4매의 돌로 조립된 상층기단의 중석은 다소 높은 감을 준다. 1매의 돌로 된 상층 기단의 갑석은 그 하부에 1단의 부연(副椽)이 있고, 상부에는 탑신을 받치기 위해 2단의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몰딩이 있다. 탑신은 각 층 모두 같은 모습인데 탑신석과 옥개석을 각기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각 층 모두 모서리기둥만을 새기고 탑신의 면석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2층의 탑신부터는 체감이 심하다. 파손이 심하여 원형을 잃고 있는 옥개석은 그 하부에 3단의 층급받침이 마련되어 있고 물끊기가 파여 있으며, 반전이나 우동(隅棟)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탑신 위에는 노반(露盤)이 있고, 2개의 보륜(寶輪)이 중첩되어 있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규모가 적고, 가늘고 길어 보이는 세장형으로, 신라의 전형탑을 충실히 따른 고려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하겠다.

서외리 당간지주

16611     2020-09-24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 토막의 돌기둥을 연결시킨 특이한 형태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당간지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다. 방형기단 위에 지주를 세우고 몇 토막의 화강석주를 철대로 연결시킨 특이한 형식의 당간이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는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둔다. 이 깃발을 꽂아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의 양 쪽에 서서 이를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남아있으나, 대개는 두 지주만 남아있다. 이 당간지주는 당간과 당간지주가 모두 남아 있는 경우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당간지주를 세웠고, 그 사이에 놓인 당간은 몇 토막의 돌기둥을 철띠로 연결시킨 특이한 형태이다. 높이가 7.45m에 이르나 정상에 끊긴 흔적이 있어 원래는 훨씬 더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양 옆의 당간지주는 윗쪽 바깥면을 둥글게 깎아 다듬었다.

* 마을의 액운과 재난을 물리치기 위해 제사를 지낼 때 *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마을의 액운과 재난이 예상될 때는 이 당간에 기를 달고 제사를 지냈다 한다. 이러한 풍습은 사찰의 행사에 쓰이던 당간의 본래 목적과는 달리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에 이르면서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생겨난 것이다. 당간 아랫부분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조선 현종 12년(1671)에 이 당간지주를 세웠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