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도솔암(울산)

도솔암(울산)

24719     2020-02-19

울산광역시 북구 화동15길 77

도솔천(兜率天)은 장차 부처가 될 보살이 사는 곳이며, 석가모니도 현세에 태어나기 이전 이곳 에 머물면서 수행했다는 이상향이다. 현재은 미륵보살이 설법하면서 하생(下生)하여 성불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도솔천의 의미를 되새기며,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중생교화와 보살의 수행처 역할을 하기 위해 창건된 사찰이 바로 도솔암이다.도솔암(兜率庵)는 울산 북구 화봉동 무룡산(舞龍山)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구례 화엄사의 말사절로 절의 설립자인 김복선ㆍ김수화 두 청신녀(淸信女)는 중생교화의 서원으로 사찰을 창건하고, 나아가 출가하여 아일다(阿逸多)ㆍ성련(性蓮)이라는 스님으로 거듭났다. 곧 도솔암은 수행을 통해 이 땅에 도솔천을 구현하고자 하는 두 비구니의 원이 담긴 사찰인 것이다.근래에는 조선 말기까지 스님들의 손에서 손으로 비밀리에 전해지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 한 석탑을 세워, 부처님이 상존하는 울산 북부지역의 포교도량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독립관

독립관

7636     2020-02-19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독립관은 원래 1407년(태종 7년)에 중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지어진 영빈관으로서 초기의 이름은 모화루였으나, 1429년(세종 11년) 확장 개축되면서 모화관이라 개칭되었다.한말에 이르자 국제관계의 변화로 원래의 목적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던 모화관을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세우면서 독립관으로 개칭하고, 이곳에서 애국토론회를 개최하여 자주ㆍ민권ㆍ자강 사상을 고취시키는 독립운동의 기지로써 사용하였다. 그러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독립운동 탄압의 일환으로써 이 건물을 철거해버렸다.세워질 당시의 위치는 현재의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350m 떨어진 곳이었으며, 서대문독립공원 조성사업계획에 의거 전문가의 고증 자문에 따라 지상층은 당초대로 한식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순국선열들의 위패(位牌)봉안과 전시실로 사용하고, 지하층은 행사 및 유물보관을 위해 1995년 12월 28일부터 1996년 12월 31일까지 서울특별시에서 건립하였다.

최규서어서각

최규서어서각

18137     2020-02-19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만리길 35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으로 영의정을 지낸 충정공(忠正公) 최규서(崔奎瑞 1650-1735)선생에 내린 영조의 어서(御書)와 영정(影幀)을 모신 정각(旌閣)이다. 영조는 충정공의 공로를 높이 찬양하여 친필로 쓴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어서(御書)를 하사(下賜)하고 충신정문(忠臣旌門)을 세우게 했다. 그러나 정각이 선 자리에 1915년 미국 대사관이 들어서게 되어 부득이 어서(御書)를 공의 묘소가 있는 지금의 이곳으로 옮겨 모신 것이다.현재 어서각(御書閣)에는 영조의 어서, 충정공(忠貞公)의 위패(位牌), 영정(影幀), 비망기(備忘記) 등을 봉안(奉安)해 놓았으며 매년 음력 10월 6일 후손들이 모여 제향을 올린다. 팔작(八作)지붕의 한식 골기와를 얹은 건물 앞 좌우에는「어서각(御書閣)」「백연사자(白蓮祠字)」란 현판(縣額)이 걸려있다.

* 최규서 (1650 ∼ 1735)

조선 현종(懸宗) 10년(1669) 진사, 숙종(肅宗) 6년(168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대사성, 대제학, 형조와 이조의 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고 경종(景宗) 3년(1723)영의정에 올라 기노소(耆老所)에 들었다. 소론의 영수(領袖)로서 활약했으며, 특히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때는 그 음모와 주동인물을 고변(告變)함으로써 난을 토평(討平)케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저서로는「민재집(民齋集)」이 있다.

* 규격 - 정면 494cm, 측면 370cm
* 재질 - 목조

유달산

유달산

62087     2020-02-19

전남 목포시 죽교동 산27-3

* 영달산이라 불리던 목포의 상징, 유달산 * 노령산맥의 큰 줄기가 무안반도 남단에 이르러 마지막 용솟음을 한 곳, 유달산은 면적140ha, 높이 228.3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노령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끝인 산이다. 유달산은 옛부터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이라 불리웠으며 도심 속에 우뚝 솟아 목포시와 다도해를 한눈에 굽어보며 이곳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예혼을 일깨우고 있다. '호남의 개골' 이라고도 하는 유달산에는 대학루, 달성각, 유선각 등의 5개의 정자가 자리하고 있으며, 산 아래에는 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기념비 등이 있다. 1982년 발족된 추진위원회의 범시민적인 유달산 공원화 사업으로 조각작품 100점이 전시된 조각공원과 난공원 등이 조성되어 볼거리가 많으며 산 주변에 개통된 2.7km의 유달산 일주도로를 타고 달리며 목포시가와 다도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 하여 이름 붙여진 해발 228m의 일등바위(율동바위)와 심판 받은 영혼이 이동한다 하여 이름 지어진 이등바위(이동바위)로 나뉘어진 유달산은 갖가지 기암괴석과 병풍처럼 솟아오른 기암절벽이 첩첩하며 그 옛날 소식을 전하기 위해 봉수를 올렸던 봉수대와 달성사, 반야사 등의 전통사찰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임진왜란 때 이엉으로 바위를 덮어 아군의 군량미처럼 가장해 왜군의 전의를 상실케 하였다는 이순신 장군의 설화가 전해오는 노적봉을 비롯하여 유선각, 오포대 등 역사상 의미 있는곳이 많으며, 특히 유달산에는 이곳에서 멸종되면 지구상에서 영원히 소멸되는 왕자귀나무가 서식하고 있다. 정상에 올라서면 다도해의 경관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고 그 사이를 오가는 크고 작은 선박들의 모습이 충분히 아름다운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목포의 뒷산 유달산. 그 위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의 일몰이나 목포항의 야경은 이곳을 찾는 이들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 이충무공의 전술을 느낄 수 있는 곳 노적봉 * 유달산 정문격인 등구의 좌측변에 솟아있는 큰바위 봉우리이다. 목포시 대의동 2가 1의 120번지에 위치한 노적봉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술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고 있으며 한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소개되어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임진왜란때 충무공 이순신께서는 적은 군사로 많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이 봉우리에 이엉을 덜어 아군의 군량미로 위장함으로써 우리의 군사가 엄청난 것처럼 보이게 하여 겁을 먹은 왜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가게 했다는 장군의 뛰어난 전술을 이야기한 것으로 진도의 강강술래, 영산강 횟사루, 울뚝목 쇠줄 등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해룡고가

이해룡고가

18337     2020-02-19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길 109-11

경기도의 제일 남쪽 끝인 차령산맥 줄기의 산간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후기 주택이다. 마을은 서운산의 남쪽 계곡에 계곡물을 앞에 두고 약간 경사진 곳에 작은 규모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의 제일 뒷쪽 약간 높은 곳에 집이 놓여 있고 집 뒤로는 경사진 언덕이 시작된다.집은 'ㄱ'자형의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소위 튼 'ㅁ'자를 이루고 있으며 사랑채 앞으로 약간의 빈 터가 있고 집뒤 한 단 높은 대지에는 전에 후원을 꾸민 흔적이 남아 있다. 안채 마루도리에 적힌 상량문에 가경(嘉慶)2년 즉 정조21(1797)년에 집을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안채나 사랑채는 처음 지어진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안채는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 안방 2칸이 옆으로 이어지고 그 앞으로 부엌 2칸이 이어져 소위 곱은자집을 이루며 대청 좌측에는 건너방 1칸이 있다. 건너방 앞의 툇마루는 대청보다 한 단 높게 꾸미고 그 아래로 방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를 내었다. 사랑채는 건너방과 이어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ㅡ자형을 이룬다. 우측으로 2칸은 방이고 나머지 끝에 1칸이 마루가 되어 이 마루에서 뒤로 간채 건너방이 연결되며 앞에는 툇마루가 방과 마루를 이어준다. 방의 창문은 머름을 댄 띠살창으로 가공이 정교하다. 사랑채 우측으로 중문이 옆으로 이어지면서 행랑채가 되어 집의 앞쪽을 감싸도록 되어 있으나 행랑채 부분은 근래 벽돌조로 개조되었다. 집 뒤 언덕의 후원에는 자연석이 군데군데 놓이고 약간의 평지를 이루어 자연스런 맛을 남기고 있다. 2000년에 완전 멸실되었으나, 2006년 11월에 복원하였다.

* 李海龍 (이해룡)

조선 중기 서예가. 자는 해수, 호는 북악(北嶽). 본관은 경주(慶州). 1588년(선조 21) 사자관(寫字官)으로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많은 필적(筆蹟)을 남겼다. 임진왜란 때는 역관(譯官)으로 일본과의 화의교섭에 힘썼다. 95년 동지중추부사, 1602년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에 이르렀고 경천군(慶川君)에 봉해졌다. 해서(楷書)에 뛰어났으며, 당시의 대가들로부터 한석봉(韓石峰)에 필적하는 명필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금석문으로 사현(沙峴)의 양호묘비(楊鎬墓碑)를 썼다.

두현리 석조삼존불입상

두현리 석조삼존불입상

17498     2020-02-19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두현리

두현리 석조삼존불상은 태봉산 아래 민가 옆 보호각 안에 봉안되어 있으며 불상은 지상에 노출된 전면에 저부조(低浮彫)로 입상의 삼존(三尊)을 조각하였다. 삼존불상은 허리 이하가 땅속에 묻혀 있어 전체 높이를 알 수 없지만 지상에 노출된 높이가 본존 118cm, 우협시보살(右挾施菩薩)이 86cm, 좌협시보살이 99cm이다.삼불상은 마모가 너무 심하여 세부적인 표현을 알 수 없는데 전체적으로 불신에 비하여 불두(佛頭)가 크게 강조된 것이 특징이다.또 본존은 높은 육계(肉桂)를 지니고 목에는 희미한 삼도(三道)가 표현되었으며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은 밑으로 늘어져 가슴과 허리 밑으로 U자형의 옷 주름이 길게 늘어져 있다. 석불의 뒷면은 아무 조식(彫飾)을 가하지 않았다.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지만 훼손이 너무 심하여 불상의 세부 표현을 거의 알 수 없을 정도이다. 두현리 마을 주민들이 더이상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하여 보호각을 만들어 보존하고 있다.

성주 성산동 고분군

성주 성산동 고분군

19663     2020-02-19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 성산가야 지배층의 고분군, 성산동 고분군 *

성산동 고분군은 성주읍의 남동쪽 성산에 입지한 가야시대 고분군으로 성주일대를 거점으로 하였던 성산가야 지배층의 고분군으로 알려져 있다. 고분군은 성산의 능선을 따라 크고 작은 봉토분들이 밀집하여 분포하고 있는데, 대부분 원형으로 현재까지 129기가 확인되어 정비 및 복원을 하고 있다. 1호분은 구덩계앞트기식돌방무덤[竪穴系橫口式石室墳], 2호분은 2개이 딸린덧널[副槨]이 있는 구덩식돌방무덤, 6호분은 구덩식돌방무덤이며, 성산동대분은 으뜸(서)-딸린(동)덧널식무덤이며, 8호분은 경주지역에서 보이는 굴식돌방무덤이다.껴묻거리[副葬品]로는 1호분에서 토기류, 철부, 은제관장식, 금제귀걸이, 은제대구, 고리긴칼[環頭大刀]이, 2호분에서는 토기류와 관못, 손칼,창, 철부, 철제은장고리가, 6호분에서는 소량의 토기 철기류가 출토되었는데 토기류 중 굽다리접시[高杯]는 엇갈린 2단 투창(透窓)이 뚫린 것이다. 성산동대분에서는 300여 점에 달하는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38 ·39 ·57 ·58 ·59호분은 모두 할석(割石) 혹은 판석(板石)으로 된 구덩식돌방무덤이다. 38 ·39 ·59호분에서는 2인 이상을 매장한 다장묘(多葬墓)로 순장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들 5기의 고분에서는 토기류, 말갖춤류[馬具類], 꾸미개류[裝身具類] 등 900여 점에 이르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 성산고분에서 나온 유물에 대하여 *

성산고분은 일제강점기에 일부가 발굴 조사된 바 있으며, 1986년 계명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대형 봉토분 5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이 조사를 통하여 대호를 비롯한 유개장경호, 단경호, 유개고배 등 토기류 및 은제행엽, 재갈, 교구 등의 마구류를 비롯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산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인접한 고령지역 등 다른 낙동강 이서지역과 달리 낙동강 이동양식으로 불리우는 유물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대구 화원지역의 유물군과 양식적 유사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유구의 구조와 유물구성 등은 성주지역을 거점으로 하였던 고대 정치체의 일면모를 알 수 있게 한다.

[문화재 정보]
지정번호 : 사적 제86호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시대 : 가야
규모 : 129기
종류 : 고분군

최경회사당

최경회사당

6850     2020-02-19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다산길 55

임진왜란때 진주성 싸움에서 장열히 순절한 최경회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원래는 1833년(순조 35)에 한천면 금전리에 세워졌으나 이 곳이 저수지 공사로 수몰되자 1963년 3월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충의공 최경회장군(1532-1593)은 자가 선우이고 호는 삼계 또는 일휴당으로 화순출신이다. 1561(명종66) 진사가 되고, 1567년(선조원년) 문과에 급제하여 장수, 무장현의 현감과 영해부사 등을 거친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의병을 규합하여 금산, 무주, 창원, 성주 등지에서 대첩을 거두고, 진주성에서 왜병과 싸우다 순국하였다.동면 백룡리에 최경희 장군의 뜻을 기리는 사당인 충의사가 지어져 있으며, 또한 능주면 잠정리의 삼충각 한편에도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화순성화명도로수축시주목록암각기문

화순성화명도로수축시주목록암각기문

17307     2020-02-19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

능주면 잠정리 충신강변에 있는 삼충각 중 최경회 선생 정각(旌閣)이 있는 석대 아래에 새겨져 있는 기문으로 바로 위에는 목사송후유룡청덕애민비(牧使宋候儒龍淸德愛民碑)가 있다. 전체적으로 가로 150cm, 세로 80cm 가량의 면을 이용하여 약 5cm의 크기로 25행 180여자를 새겨 놓았는데 석질이 좋지않고 풍화가 심하여 왼편으로 갈수록 판독이 곤란하다. 이 기문은 각행의 글자수나 줄 등이 나란하지 않고 매우 불규칙한 형태로 새겨져 있다.판독 가능한 부분을 통해 보면 이 기문은 성화 21년에 능성현의 남쪽 오리정(五里亭)앞에서 구질건연(仇叱健硯=거치른벼랑)까지 도로수축 사업에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것이다.성화21년 을사년은 조선성종 16년(1485)에 해당된다.도로수축의 시주자들은 대시주, --시주, 상-시주, 대화주, 몽민화주 등으로 구분되어 있고, 각장의 이름도 나온다. 기문의 두곳에 여고리라는 지명이 보이나 의미는 잘 알 수 없다.이 기문에 보이는 여러 인명들 자료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는 사람은 대시주로 기록된 장사랑(將仕郞) 구용연(具龍淵)뿐이다.

구용연은 본관이 능성, 자는 회관, 호는 농포로 고려때 평장사를 지낸 구민첨(具民瞻)의 후손이며 구득인(具得仁)의 아들이다. 1450년(세종32)에 태어나 1534년(중종29)에 85세로 졸하였다. 이를 보면 도로수축에의 시주는 그의 나이 36세의 일이다.효행이 뛰어났다 하며 문행이 있어 음직으로 장사랑을 지냈다. 부인은 우산송씨 중인의 딸로 그와 동갑이며, 그보다 2년 앞서 졸하였다.한편 이들 인명들이 모두 시주, 화주, 거사 등 불교적 용어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로 보아 불교 신앙단체가 도로수축에 관여했거나, 절에서 도로수축사업을 주관하였을 추측이 들기도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이 암각기문은 조선초기에 도로를 수축하는 사업에 지방민들(혹 불교의 신앙단체)의 많은 경제적 도움을 얻었다는 구체적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 성화 21년이라는 절대연기가 명기된 점, 오리정 및 구질건연, 여고리와 같은 지명이나 시주한 인물들의 구체적 이름 및 시주의 등급 등이 명기되어 있다는 점에서 지방사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처인성

19882     2020-02-19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

아곡리 입구에 서있는 고려 시대의 토성으로 지금은 동남서쪽에 토성의 흔적만이 길이 250m 정도로 남아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밀려오는 몽고군을 맞아 민병과 승병이 일치단결하여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하고 승전을 하는 기적을 낳게하였던 곳이라 전한다. 이곳을 승장 김윤후가 적장을 사살했다 하여 사장터라 부르기도 한다.

고려 고종 19년(1232) 9월 몽고군의 2차 침공 때 승장 김윤후가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하여 승리로 이끈 대몽항쟁의 전승지로 유명하다. 이 대첩에서 관군 못지 않게 처인부곡민들이 합심하여 처인성 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냈다는 사실은 지역민의 단결은 물론 자주 주권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처인성 북쪽 들판은 지금도 사장터로 불려지고 있는데, 일설에는 살리타이가 사살된 장소라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육로의 요충지인 처인에 주둔한 왜병을 무찌르기 위해 수원의 독산성에 집결한 관군의 대부대가 처인을 재탈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운양서원

1155     2020-02-19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운정길 167

운양서원은 여희림(呂希臨)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으로써 그가 1553년에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뒤 언제인지는 모르나 천곡서원 향현사(鄕賢祠)에 위패를 모시고 추앙되었다.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훼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었다가, 1874년 사림의 힘으로 운양서원(雲陽書院)이 세워져, 다시 명덕사(明德祠)에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향사일은 음력이월 마지막 정일(丁日)과, 음력팔월 마지막 정일(丁日)에 향사한다. 이 서원의 첫 이름은, 연봉산(延鳳山) 밑에 자리 잡았기에 연봉서원(延鳳書院)이었다. 내 이름이 伊川(이천)이요, 동산이름이 운곡산(雲谷山)이라, 이천운곡(伊川雲谷) 네글은 전답자에서, 川谷(천곡) 두글자를 따서 정구(鄭逑)가 이황(李滉)에게 품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으로 바꾸게 된 것이라 한다. 1874년에 서원이 다시 세워지면서 운양서원이라 하였다.

낙덕정

15534     2020-02-19

전라북도 순창군 북픙면 상송리

명종 즉위년(1545)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학자인 하서 김인후가 관직을 그만두고 세상을 피해 숨어 살던 곳다.김인후는 낙덕암 주위의 산세를 유난히 좋아했던 것으로 전하며, 자연을 즐기는 한편 후세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고종 4년(1900)에는 훗날 이곳에서 훌륭한 인재가 나올 것이라는 김노수의 예언을 따라 낙덕암 위에 정자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