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해안공원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백수해안공원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백수해안공원

백수해안공원

16.7 Km    0     2024-04-24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백암리 223-2

잔디밭으로 조성된 해안산책 공원으로 해안 따라 조성된 둘레길이 있으며 노을 전망대가 언덕 위에 자리한다. 잠시 차를 세우고 힐링 타임을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다. 백수해안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거북바위와 모자바위도 만나볼 수 있다. 백수해안공원 및 해안도로에 있는 촛대바위, 거북바위, 모자바위는 전설에 따르면 어부가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자 그의 부인이 아이를 등에 업고 촛대를 들고 나가 바닷가에서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돌이 됐다고 한다. 바다에서 익사한 남편은 거북이가 돼 촛불을 보고 바닷가로 돌아와 돌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16.7 Km    17197     2024-02-02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동학농민혁명은 한국근대사에서 전국에 걸쳐 사회개혁 의지를 처음으로 드러낸 역사적인 사건이다. 고창 무장기포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권운동이기도 한 동학혁명의 시발점으로 의미가 매우 큰 유적지이다. 고창군에서 대산면으로 가는 국도 22호선 왼쪽 구수마을 일대에 위치하여 있다. 참고로, 무장은 지명이며 기포지는 동학농민혁명 포고문을 선포한 집결지를 의미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참뜻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이곳에는 동학농민혁명의 훈련장으로 사용된 터와 [갑오동학농민군 고창주 의장 추모비]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갑오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전봉준 총대장, 김개남 총관령과 손화중 총관령 세 지도자와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창군으로 통합되기 이전인 고창현, 무장현, 홍덕현을 의미하는 늘 푸른 소나무 세 그루를 상징적으로 식재해 놓았다. 기존 기포지에 설치되어 있었던 동학농민혁명 기념탑과 조형물들은 고창동학농민혁명 성지화사업 진행으로 (구)신황초등학교에 옮겨 놓았으므로 함께 연계해서 방문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프로방스펜션

프로방스펜션

16.8 Km    1     2023-11-14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해안로 677

영광군 백수읍 해안로에 자리 잡은 프로방스캠핑은 1,650㎡(500평)의 규모에 일반야영장 3면, 글램핑시설 3동이 있고, 펜션과 함께 운영 중이다. 이곳은 바다를 보며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잔디밭, 산책로, 몽돌해변이 있으며 서해안의 아름다운 노을까지도 같이 볼 수 있다. 캠핑장 한쪽으론 백수 해안의 기암절벽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다른 한쪽으론 멀리 영광염전 주변의 풍력단지가 보이며, 정면으론 하늘과 맞닿은 드넓은 수평선이 펼쳐진다. 특히, 전국 9대 일몰 명소로 알려진 백수 해안의 일몰이 장관이다. 사이트에 앉아서 감상할 수 있어 굳이 일몰을 보기위해 따로 이동하지 않아도 된다. 캠핑장 아래 바닷가에선 고동이나 소라 채취도 가능한데 직접 잡은 고동이나 소라를 삶아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영광정유재란열부순절지

영광정유재란열부순절지

17.0 Km    18793     2023-12-04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해안로 847-8

정유재란 당시(1597) 왜적의 참화가 절정에 이른 9월 호남의 서남단일대가 그들의 손아귀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등에 거주한 동래 정씨, 진주 정씨 두 문중의 아홉의 부녀자들은 각기 남편들이 전사하거나 왜적에게 붙잡히자 화를 피해 현 위치인 묵방포 앞 칠산 앞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아홉 부인들이 여자로서 지고한 정절을 지켜 순절한 것을 나라에서 기리고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숙종 7년(1681) 상을 주고 정려(旌閭)를 내려 이들의 정절을 기렸다. 현 두 개의 비각은 1942년과 1964년에 세운 것으로, 바다를 뒤로 하여 팔각 돌기둥 4개를 세우고 그 위에 팔작형의 지붕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순절비부근으로 온통 양귀비꽃 군락지여서 붉은 양귀비꽃과 순절지 뒤로 펼쳐지는 바다 풍경이 처연하다.

우리삶문화옥당박물관

우리삶문화옥당박물관

17.0 Km    1     2023-12-14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대신길3길 3

영광은 역사적으로 백제 최초로 불교를 전파하였던 지역이며 한국의 토착종교인 원불교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불갑사와 지석묘군, 내산서원 등 문화 유산뿐만 아니라 영광굴비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영광의 뿌리 깊은 문화와 역사를 재 조명하고 널리 알리고자 개관한 우리삶문화옥당박물관은 영광 지역민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삶 문화실에서는 한반도에서의 우리 조상들의 삶과 관련된 영광 출토 유물들을 관람할 수 있으며 세계 문화유산을 함께 소개한다. 옥당 인물실은 영광을 빛낸 인물들 중 성리학, 종교, 예술 분야에 뛰어난 인물을 선정하여 그들의 삶을 둘러보는 콘텐츠를 운영하고 있으며, 용무당은 역사와 유물과 역사적 인물을 통해 영광의 역사를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현재 우리삶문화옥당박물관은 고고민속유물, 불상, 카메라 음향장비등 인간삶의 다양한 문화요소를 간직한 유물을 전시, 관리하고 있다. 특히 이미지 언어로서의 카메라 음향장비를 전시하고 있으며, 이와 연계한 다양한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도림사(광주)

도림사(광주)

17.1 Km    14973     2023-12-06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림하길 33

도림사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림마을 입구에 있으며 노사 기정진(1798~1879), 난와 오계수(1843~1915), 후석 오준선(1851~1931)을 모신 사우이다. 기정진은 고종 3년(1866)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병인소를 올려 외적을 방비하는 대책을 건의하였고, 위정척사사상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오계수는 기정진의 제자로 을미사변 후 일어난 을미의병에 참여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가마마을 뒤쪽 산에 있는 영사재에서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오준선도 기정진의 제자로, 한일병합 이후 용진산에 들어가 용진정사를 세우고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1934년 나주오씨 문중과 오계수, 오준선의 후학들이 오계수, 오준선과 기정진을 기리기 위하여 도림사를 세웠다. 도림마을은 오계수와 오준선이 태어난 곳이며, 나주오씨 문중의 집성촌이다.

대초마을

대초마을

17.1 Km    20506     2023-11-14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대신길3길 33-7

법성포항에서 굴비 정식으로 식사를 한 뒤 백수해안도로로 접어든다. 법성포항을 나오면서 백수 해안도로로 진입하는 길은 길 오른쪽에 있는데 이정표가 작아 잘 안 보인다. 차를 천천히 달리며 유심히 봐야 하는데 그 길을 달려가다 보면 모래미해수욕장을 지나 대초마을이 나온다. 이름 없는 백사장이 길 옆에 나란히 펼쳐져 있고 마을 안쪽에는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이 있으며 그 위에 다리가 하나 놓여 있다. 물이 차면 다리 밑으로 배가 드나들고 물 빠지면 강바닥이 드러난다. 강의 끝과 바다의 시작, 그 지점에서 뻘에 구멍을 파 집을 짓고 사는 칠게의 군무를 볼 수 있다.

하버브릿지

하버브릿지

17.1 Km    2     2022-12-01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상촌길 9

하버브릿지는 광주광역시 광산동에 있는 넓은 잔디 정원과 분수가 있는 카페다. 주차 공간이 넓고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어 가족과 함께 찾기 좋고 이국적인 느낌의 외관과 깔끔한 인테리어는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정원에도 10개 정도의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어, 날씨가 좋을 때 야외에서 여유를 즐기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차와 음료 그리고 다양한 케이크와 베이커리도 있다. 월봉서원, 빙월당, 두남제 등의 유적지가 주변에 있어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 중 방문하기에도 좋다.

용진정사

17.2 Km    22650     2024-04-29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서로 180-48

일제강점기의 용진정사는 한말의 도학자 후석 오준선(1851∼1931)이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자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용진산에 강당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쓴 곳으로서 한말 호남 의병활동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정사는 학문을 가르치거나 정신을 수련하기 위해 마련한 집을 뜻한다. 용진정사는 용진산 남쪽의 산록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원래 용진사가 있던 곳으로 삼봉 정도전, 우암 송시열 등이 다녀갔던 곳으로 전해진다. 절이 허물어진 뒤 청안 이씨들이 그 터를 가지고 있었으나, 후석이 정사를 짓는다는 말을 전해듣고 옛 절터의 상대와 중대를 희사함으로써 정사를 지을 수 있었다. 후석이 별세한 뒤 문인들이 정사 동쪽에 3칸의 용진영당을 세우고 1924년 석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를 모셨다. 영당의 좌우벽에는 큰아들 북파 오헌수와 둘째 아들 도호 오동수의 영정이 함께 걸려있다. * 일제강점기의 의병, 후석 오준선 * 후석은 본관이 나주이며 광산구 도덕동 도림마을에서 오하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백부 향규에게 입양되었다. 8세 때부터 이웃에 사는 친척 오태규로부터 사서와 근사록을 배웠다. 이어 18세 때부터 노사 기정진에게 배웠으며, 이를 계기로 송사 기우만, 식재 기재, 현와 고광선 등과 사귀었고, 전재 임헌회, 입재 송근수 등에게서 학문의 폭을 넓혔다. 그의 학문 체계는 경학, 성리학, 예학, 의리론 등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1910년 일제는 명사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이라는 금품을 지급하려 하였는데, 이를 거절하자 헌병대로 끌려 가 갖은 협박을 가했으나 끝내 받기를 거절하였다. 이후 1917년 용진산에 들어가 19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후학을 가르치니, 문하생이 600여명에 이르렀다. 1919년 고종이 승하 하시자 문하생들과 용진정사 앞의 바위에서 통곡하였는데, 그뒤 이 바위를 읍궁암이라 불렀고, 원수를 갚기 전에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하여 일생동안 백립을 쓰고 지냈다. 명정에 조선 유민이라 쓰도록 유언하였다. 1934년에 그의 학문적 체계를 정리한 문집 25권 12책이 간행되었다.

홍길동 생가

홍길동 생가

17.2 Km    27178     2023-02-02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홍길동로 431

홍길동은 한국인을 대표하는 민중 영웅이다. 역사상의 실존인물이며 허구적 소설의 주인공이다. 역사에서는 반역자, 또는 강도로 기록되어 있으나, 소설에서는 봉건제도에 맞서 만민평등의 이념으로 활빈당을 이끌고, 이상국인 일본 오키나와의 율도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역사상 홍길동은 조선 초 15세기 중엽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신분이 첩의 자식이라 관리등용을 제한하는 국법 때문에 출세의 길이 막혔다.좌절과 울분 속에서 출가하여 양반으로부터 차별받던 소외된 민중을 규합하여 활빈당을 결성한 후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 그러나 봉건적 조선왕조의 핍박을 받던 중 관군에 체포되어 남해로 유배되었으나 탈출하여 무리를 이끌고 오키나와로 진출하였다. 그곳에서 조선에서처럼 민중을 대변하는 민권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동안 홍길동의 역사적 실체가 왜곡됐으나, 이 문제를 바로 잡으려는 홍길동 연구팀(장성군, 연세대학교국학연구회, 전남매일, 유구대학, 오키나와관광국, 석원도문화원)의 3년에 걸친 끈질긴 노력 끝에 그 베일에 싸인 비밀이 밝혀졌다.
조선에서 뱃길로 3000리나 떨어진 일본 최남단의 섬 오키나와에서 후반부 삶을 살았던 그곳에는 민권운동의 선구자 홍길동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서 있다. 이러한 홍길동의 생애 전반에 걸친 학술연구의 성과가 총체적으로 정리되었으며 500여 년 전의 일본과 한국 간의 교류사를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이에 장성군은 홍길동 생가터 주변에 18,843m²(5,700여 평)의 부지를 사들였으며, 생가터 발굴 작업 및 철저한 고증을 거쳐 생가를 복원하였고 2004년 5월 3일 홍길동 전시관을 개관하여 새로운 관광지로 발전하고 있다.

* 건물 - 211.37㎡ / 안채(한식기와) 132.23m²(40평), 아래채(초가) 16.52m²(5평), 사랑채 29.75m²(9평), 문간채 33.05m²(10평)
* 구조 - 전통한식 목구조
* 조선시대 생활상 전시 - 100여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