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선덕여왕릉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경주 선덕여왕릉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경주 선덕여왕릉

경주 선덕여왕릉

0m    33972     2020-02-05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선덕여왕릉은 둘레가 73m정도의 편이한 원형 봉토분이며, 자연석을 이용해 봉분 아래에 2단 보호석을 쌓은 것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는 진평왕의 딸로 태어나 성골이라는 신라왕족의식에 의해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재위 16년간 분황사와 첨성대를 세웠고, 특히 신라 최대의 황룡사 9층목탑을 세워 신라 불교건축의 금자탑을 이루기도 하였다. 또한, 뒷날 태종 무열왕이 된 김춘추와 명장 김유신 같은 영웅호걸을 거느리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기초를 닦아 놓았다. 그러나 여성왕이라는 약점 때문에 왕권이 불안하여 재위 말년에 비담, 염종의 난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과 관련하여 선덕여왕때 황룡사 구층탑, 분황사 등의 건립으로 그 통일의 뜻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는 선덕여왕이 죽을 날을 예언하며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도리천은 불교설화의 수미산 밑을 이야기하는 데 어디를 말하는지 몰라 신하들이 묻자 낭산 기슭이라 대답하였고, 이 기슭에 여왕의 시체를 장사지낸 지 30여 년 만에 밑에 사천왕사가 창건되었고 사천왕이란 도리천의 호불신인데 무덤이 결국 도리천에 있는 셈이 되었다. 선덕여왕릉은 사적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변에 신문왕릉, 효공왕릉, 신무왕릉, 효소왕릉 등이 있다.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25m    21228     2020-02-05

경상북도 경주시 탑골길 36

이 일대는 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남쪽의 큰 바위에는 목조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석탑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남쪽면의 불상을 주존으로 하여 남향 사찰을 경영했었음을 알 수 있다. 9m나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에 여러 불상을 회화적으로 묘사하였다. 남쪽 바위면에는 삼존과 독립된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고, 동쪽 바위면에도 불상과 보살,승려, 그리고 비천상(飛天像)을 표현해 놓았다.

불상·보살상 등은 모두 연꽃무늬를 조각한 대좌 (臺座)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 한 광배 (光背)를 갖추었으며 자세와 표정이 각기 다르다. 비천상은 하늘을 날고 승려는 불상과 보살에게 공양하는 자세이지만 모두 마멸이 심해 자세한 조각수법은 알 수 없다. 서쪽 바위면에는 석가가 그 아래에 앉아서 도를 깨쳤다는 나무인 보리수 2그루와 여래상이 있다. 하나의 바위면에 불상·비천·보살·승려·탑 등 다양한 모습들을 정성을 다하여 조각하였음은 장인의 머리속에 불교의 세계를 그리려는 뜻이 역력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조각양식은 많이 도식화되었으나 화려한 조각을 회화적으로 배치하여 보여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특이한 것이다.

보리사마애석불

보리사마애석불

368m    0     2020-02-13

경상북도 경주시 갯마을길 41-30

경주에 있는 보리사마애석불은 높이 2m의 바위벽에 돋을새김으로 새겨 놓은 마애불(자연의 암벽, 동굴 등에 새긴 불상)이다. 통일신라 시대의 마애불에서는 보기 힘든 온화한 표정이 눈길을 끈다.남산에 있는 보리사에서 남쪽 약 10분 정도 떨어진 가파른 산자락에 절벽을 이룬 커다란 바위가 있다. 오르기도 쉽지 않은 이 비탈진 곳에 바위벽을 얕게 파서 1.1m 정도의 작은 불상을 새겨 놓았다. 결가부좌를 튼 단정한 자세로 명상에 잠긴 불상이 마치 속세를 굽어보는 듯하다. 마애불이 바라보는 대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멀리 선덕여왕이 잠들어 있는 낭산, 사천왕사 등 서라벌의 전경이 펼쳐진다.

보리사(경주)

보리사(경주)

412m    21502     2019-10-11

경상북도 경주시 갯마을길 41-30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66번지에 위치한다. 보리사(菩提寺)는 경주시 남산(南山)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화랑교를 넘어 탑골 입구에서 약 400m 남으로 가면 갯마을이 있다. 옛날에 나룻배가 닿던 곳이라 한다. 지금은 임업시험장이 있어 온 동네가 푸른데, 이 뒤쪽 계곡이 미륵골이다. 대밭 옆길로 난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면 정상 가까운 아늑한 곳에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보리사가 있다.

근래에 새로 세운 대웅전과 산신각 및 종각이 있는데, 이 건물들은 지금 남산에 현존하는 가람중에서 제일 규모가 큰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49대 헌강왕의 능과 50대 정강왕의 능이 보리사 동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이 절은 두 왕릉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옛날 신라시대부터 보리사라 불리워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에는 통일신라시대 후반의 석불을 대표하는 유명한 석조여래좌상이 있으며, 보리사 앞에서 남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산비탈로 35m쯤 가면 경사가 급한 산허리에 마애불이 있다.

신라의 불국토 남산에서 부처를 만나다

신라의 불국토 남산에서 부처를 만나다

505m    3195     2017-05-15

경주 동남산 자락에는 탑곡, 미륵곡, 불곡 등 골짜기마다 신라의 부처님들이 새겨져 있다. 남산의 또 다른 코스인 칠불암에서는 국보로 지정된 칠불암 마애불상군과 속세를 굽어보는 듯한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등 신라 최고의 불상을 만날 수 있다. 소나무 숲길이 아름다운 정강왕릉과 헌강왕릉 진입로는 동남산 여행의 덤이다.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

621m    33773     2019-09-26

경상북도 경주시 통일로 367

경주 남산자락에 위치한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소에는 향토 희귀수목과 천연기념물, 야생화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으로 도민의 휴식공간과 자연학습의 명소가 되고 있다.

경주 신문왕릉

경주 신문왕릉

1.2 Km    19249     2019-12-18

경상북도 경주시 능말길

사천왕사터를 지나 문무로를 조금 지나면 왼쪽으로 31대 신문왕의 능이 있다. 능 앞에는 주차장 시설이 번듯하며 잘 자란 소나무가 서 있는 묘역도 잔디로 잘 가꾸어져 있다.신문왕(681~692년)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의 맏아들로 문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재위 12년 동안 관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확립하였으며 학문을 장려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국학을 설치하였다. 당나라를 비롯한 외국과도 빈번히 교류하여 문화의 융성을 도모하는 등 신라 전성 시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능은 원형 봉토분으로서 길이는 29.3m이고 높이는 7.6m이다. 밑 둘레는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갑석을 덮었으며 이 석축을 지탱하기 위해 44개의 호석을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구조의 호석은 통일신라 왕릉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호석이 나타나기전 단계의 것으로, 고신라 고분의 그것보다는 한층 발달된 형식이다.

화랑교육원

화랑교육원

1.2 Km    19629     2020-03-25

경상북도 경주시 새남산길 62

본 교육원은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던 신라 화랑들이 심신을 단련하고 호연지기를 길렀던 수련의 도장인 경주의 남산 동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경상북도교육청 직속 기관이며, 1973년 5월 전국 최초의 학생 교육원으로 개원한 이래 화랑의 얼을 계승하여 투철한 국가관을 확립하고 바른 품성과 인격을 도야하기 위하여 그동안 교원 연수교육과 중고생 수련교육, 재외교포 학생 교육과 사관생도 교육, 그리고 일반 대학생 교육과 공무원 교육 등을 담당해 왔다. 화랑의 얼을 가슴에 담아 조국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과 협동하는 새 화랑이 될 것을 다짐하면서 우리 화랑의 집을 거쳐간 수련생이 지금까지 31만여명에 이르고 있다.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

317m    20104     2020-02-05

경상북도 경주시 문천길

경주 남산 동쪽 기슭 부처 골짜기의 한 바위에 깊이가 1m나 되는 석굴을 파고 만든 여래좌상이다.불상의 머리는 두건을 덮어쓴 것 같은데 이것은 귀 부분까지 덮고 있다. 얼굴은 둥그렇고 약간 숙여져 있으며, 부은 듯한 눈과 깊게 파인 입가에서는 내면의 미소가 번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인왕리 석불좌상과 유사하지만 전체적으로 자세가 아름답고 여성적이다. 양 어깨에 걸쳐입은 옷은 아래로 길게 흘러내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까지 덮고 있는데,옷자락이 물결무늬처럼 부드럽게 조각되어 전체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석불은 경주 남산에 남아있는 신라 석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국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 불상으로 인하여 계곡 이름을 부처 골짜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425m    19741     2020-02-05

경상북도 경주시 갯마을길 41-30

신라시대의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석불좌상으로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한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에서는 은은하게 내면적인 웃음이 번지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힘없이 축 늘어진 느낌이며, 군데군데 평행한 옷주름을 새겨 넣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대고 있는 항마촉지인 (降魔觸地印)인데 다소 연약해 보인다. 불상과는 별도로 마련해 놓은 광배(光背)는 매우 장식적인데, 광배 안에는 작은 부처와 보상화·덩쿨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특히 광배 뒷면에는 모든 질병을 구제한다는 약사여래불을 가느다란 선으로 새겨 놓았는데, 이러한 형식은 밀양 무봉사나 경북대 광배 등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예이다.

경주 망덕사지

991m    18436     2020-02-05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문왕 4년(684) 여름에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사천왕사지 건너편에 있다. 당군이 침입할 때 사천왕사를 짓고 비법으로 물리치자 당에서는 그 사실을 알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했다. 사천왕사를 보이지 않고 급작히 새로 망덕사를 지어 속였다. 당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우리는 절을 지어 당황제 만수(萬壽)를 빌었다'라는 거짓 구실로 당사를 속여 조국의 위난을 극복한 신라인의 지혜와 호국의 얼이 담긴 옛터이며 당간지주, 당탑지, 초석 등이 남아 있다. 사역은 24,261㎡(7,352평)이다.

* 연혁(유래)

망덕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5년(685) 4월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한다.'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의 외침을 막기 위하여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당(唐)에 대해서는 거짓으로 당황제 고종을 위한 절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당에서 예부시랑 악붕구(樂鵬龜)를 신라에 보내어 사천왕사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였다. 신라 조정이 당의 사신을 망덕사로 인도하자, 그들은 문 앞에 서서 말하기를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라 하여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이 망덕사지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의해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차에 걸쳐 발굴조사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13층 목탑지와 금당터·강당터·중문터·회랑터·익랑터 등이 남아 있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쌍탑 절 배치를 보이고 있다. 이 밖에 남쪽에는 계단터, 서남쪽에는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 수량 - 24,304㎡
* 시대 - 신라시대

경주 일성왕릉

1.0 Km    18755     2020-02-05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경주 남산 서쪽 약간 경사진 지점에 위치하며 하단에는 석축을 쌓았다. 봉분 전면에는 자연석으로 쌓은 호석으로 보이는 석열이 있고 봉분 주위에도 그러한 돌을 돌렸던 듯하다. 석상은 후세에 설치한 것이다. 신라 7대 일성왕(134∼154)은 유리왕의 장자 혹은 유리왕 형의 아들이라고도 하나 미상이다. 왕은 농토를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으며 민간에서 금, 은, 주옥의 사용금지를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치에 주력하였다. 봉분은 높이 7m, 직경10m이며 주위 면적은 34,557㎡(10,472평)이다.

* 연혁(유래)
이 능은 신라 제7대 일성왕(逸聖王, 재위 134∼154)을 모신 곳이다. 경주 남산의 북쪽인 해목령에서 뻗어내리는 능선의 서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일성왕의 성은 박씨(朴氏)인데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왕의 맏아들로, 삼국유사에는 제3대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7대 지마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왕은 농사짓는 땅을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으며, 백성들이 금은주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왕릉의 봉분은 지름 15m, 높이 5m인데 둘레의 돌이나 주위 환경으로 보아 내부 구조는 돌방(석실)으로 추정된다. 이 능은 조선 영조 6년(1730) 이후에 알려지기 시작한 왕릉이다. 한편 이 왕릉은 삼국사기에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는 경애왕릉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