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성산동 고분군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성주 성산동 고분군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성주 성산동 고분군

성주 성산동 고분군

0m    19663     2023-12-14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 성산가야 지배층의 고분군, 성산동 고분군 * 성산동 고분군은 성주읍의 남동쪽 성산에 입지 한 가야시대 고분군으로 성주일대를 거점으로 하였던 성산가야 지배층의 고분군으로 알려져 있다. 고분군은 성산의 능선을 따라 크고 작은 봉토분들이 밀집하여 분포하고 있는데, 대부분 원형으로 현재까지 129기가 확인되어 정비 및 복원을 하고 있다. 1호분은 구덩계앞트기식돌방무덤[竪穴系橫口式石室墳], 2호분은 딸린덧널[副槨]이 있는 구덩식돌방무덤, 6호분은 구덩식돌방무덤이며, 성산동대분은 으뜸(서)-딸린(동)덧널식무덤이며, 8호분은 경주지역에서 보이는 굴식돌방무덤이다.껴묻거리[副葬品]로는 1호분에서 토기류, 철부, 은제관장식, 금제귀걸이, 은제대구, 고리긴칼[環頭大刀]이, 2호분에서는 토기류와 관못, 주머니칼, 창, 철부, 철제은장고리가, 6호분에서는 소량의 토기 철기류가 출토되었는데 토기류 중 굽다리접시[高杯]는 엇갈린 2단 투창(透窓)이 뚫린 것이다. 성산동대분에서는 300여 점에 달하는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38 ·39 ·57 ·58 ·59호분은 모두 할석(割石) 혹은 판석(板石)으로 된 구덩식돌방무덤이다. 38 ·39 ·59호분에서는 2인 이상을 매장한 다장묘(多葬墓)로 순장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들 5기의 고분에서는 토기류, 말갖춤류[馬具類], 꾸미개류[裝身具類] 등 900여 점에 이르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 성산고분에서 나온 유물에 대하여 * 성산고분은 일제강점기에 일부가 발굴 조사된 바 있으며, 1986년 계명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대형 봉토분 5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이 조사를 통하여 대호를 비롯한 유개장경호, 단경호, 유개고배 등 토기류 및 은제행엽, 재갈, 교구 등의 마구류를 비롯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산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인접한 고령지역 등 다른 낙동강 이서지역과 달리 낙동강 이동양식으로 불리는 유물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대구 화원지역의 유물군과 양식적 유사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유구의 구조와 유물구성 등은 성주지역을 거점으로 하였던 고대 정치체의 일면모를 알 수 있게 한다.

가실성당

가실성당

10.0 Km    584     2023-06-22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가실1길 1

가실성당은 1895년에 조선 교구의 11번째 본당으로 초대본당신부는 파리외방선교회의 하경조 신부다. 본당의 넓은 관할 지역 안에는 공소 31개가 있으며, 현재의 성당 및 사제관은 1924년에 완성되었다. 성당의 주보성인 성당은 인민군 병원으로 그대로 남아있으며, 전쟁 관계로 월남한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신부들은 1952년부터 가실성당을 위한 사목을 맡고있다. 가실성당에 속하고 있더거 본당이 된 곳은 모두 4개이며, 김천 황금동, 용평, 퇴강, 왜관이 있다. 1995년 100주년 사업으로 현재 성모당이 형성되었고 성당의 거룩한 분위기를 높이는 색유리화는 2002년에 설치되었고 2003년에 성당 및 구사제관은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낙빈서원

10.1 Km    16773     2023-11-02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동4길 21

낙빈서원은 단종의 복위에 목숨을 바친 하위지, 박팽년 이개, 성삼문, 유성원, 유응부를 배향한 서원이다. 본래 충정공 박팽년의 위패를 봉안한 하빈사가 있어 후손들이 향사를 지내왔는데, 현손인 박계창이 사당 밖에서 사육신 여섯 분이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깨달은 바가 있어 사육신 여섯분을 함께 모시고 제향하게 되었다. 1691년(숙종 17)에는 별묘와 강당을 건립하여 낙빈서원을 창건하였는데, 3년 후 숙종으로부터 사액을 하사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흥선 대원군 집권기인 1871년(고종 8) 훼철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4년 문중에서 원래 터보다 위쪽인 현 위치에 강당만 중건하였고, 사당은 세우는데 어려움이 있어 서원의 모습보다는 문중의 재사와 비슷한 모습으로 사용되었다. 1970년대에 후손들이 모여사는 묘골마을에 육신사가 세워지면서, 사육신의 위패를 옮겨 봉안하고 매년 춘추절 향사도 지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낙빈서원은 현재 재실로 사용되고 있다. 서당에서 출발한 교육 기능 중심의 서원과는 달리 조상을 모시던 사당에서 출발한 조선 후기 서원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육신을 모신 서원은 전국에 여러 곳 있었는데 단종의 능이 있는 영월 창절사가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남아 있다. 경내 건물은 강당 1채만 남아 있으며, 강당 건물에는 낙빈서원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밖에 비석 1기가 남아 있다. 현재 낙빈서원에서는 향사를 드리지 않고 육신사에서 지낸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평면 구성은 중앙에 2칸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을 둔 중당 협실형이다. 가운데 마루 2칸의 칸살을 좌우 온돌방보다 작게 잡았으며, 좌우 온돌방과 마루 사이는 4분합 들어 열개문을 달았다. 온돌방 뒤편에 벽장을 만들고, 전면 출입문 위에 환기창을 두었다. 자연석으로 기단을 낮게 조성한 후 정면 기둥만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인근에는 함께 둘러보기 좋은 곳으로 달성 삼가헌 고택이 있다.

달성 삼가헌 고택

10.1 Km    16911     2023-11-16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동4길 15

달성 삼가헌은 사육신의 한 분인 충정공 박팽년의 자손들이 정착하여 살고 있는 박씨마을 묘골과 낮은 산 하나를 경계로 하여 자리 잡은 조선시대의 주택이다. 넓은 터에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별당, 연못이 배치되어 있다. 박팽년의 11대 손인 성수가 1769년에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신의 호를 현판으로 걸어 삼가헌이라 이름 지었으며 그 뒤 그의 아들 광석이 1783년 이웃하고 있는 묘골에서 현재 위치로 분가한 다음 1826년 초가를 헐고 안채와 사랑채를 지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이며, 안채는 사랑채를 거쳐야 출입을 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대략 트인 ㅁ자형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채와 곳간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넓은 대청과 골방이 딸린 온돌방 2칸, 마루방, 청지기방을 두었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 개방된 툇마루 등으로 꾸몄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서쪽으로 장독대, 곳간채, 안변소가 자리 잡고 있다. 삼가헌의 백미, 별당인 하엽정은 연꽃잎의 정자라는 뜻으로 1826년 집을 지을 당시 많은 흙을 파낸 자리에 박광석의 손자 규현이 1874년에 연못으로 꾸며 연을 심고 파산서당을 앞으로 옮겨 지으면서 원래 4칸 규모의 ㅡ자형이었던 건물을 누마루를 한 칸을 늘여 현재의 모습으로 건축하였다. 원래 서당으로 쓰던 곳이라 하엽정이라는 현판과 함께 방앞 처마에는 파산서당 편액을 같이 볼 수 있다. 연못은 앞쪽으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이고 가운데 원형 섬을 두고 섬까지는 외나무다리가 있다. 여름철 연못에 연꽃이 피고 주변 배롱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하면 아름다운 풍광이 삼가헌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에 건축된 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남긴 대표적인 주택이다.

성주 백세각

10.4 Km    2     2023-06-14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1길 27-3

백세각은 조선 중기 문신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1494~1558)가 건립한 건조물이다. 그는 사헌부 집의로 재직하면서 당시 세도가인 윤원형(尹元衡)의 행패를 탄핵하다가 오히려 전라도 고산(高山)으로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5년 간 귀양살이를 하고 난 뒤 고향에 돌아와 마을이름을 고산리(高山里)라 바꾸고 조선 명종 6년(1551)에 기공하여 이듬해 완공한 가옥이다. ‘ㅁ’자형 가옥으로 정면 7칸, 측면 7칸인 맞배지붕 건물이다. 쇠못을 전해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얽은 점, 대패질을 하지 않고 자귀만으로 깎고 다듬어 만든 건축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1919년 3·1운동 당시 공산(恭山 弼宋浚을 위시한 문인들이 성주 장날의 만세 운동에 배포할 태극기를 이 건물에서 제작·보관했다고 한다. 또한 경북 유림단 파리장서 사건의 모의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유림의 궐기를 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을 제작·배포한 곳으로 독립운동과 관련이 깊은 건물이다. 아울러 독립유공자 공산 송준필(애족장)과 괴당(槐堂) 송회근(宋晦根,애족장)이 내어난 집이기도 하다.

묘골마을

10.4 Km    16529     2023-11-02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39-4

달성군 묘골마을은 낙동강 동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전통마을로 사육신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박팽년은, 세조 2년인 1456년 사육신들과 모의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멸문의 화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박팽년이 혈통을 보전하게 된 이유는 당시, 박팽년의 둘째 아들 박순의 아내 이씨 부인이 임신 중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뱃속에 든 아이까지도 아들일 경우 죽이라고 명하였고, 이씨 부인은 친정인 묘골에 내려와 살다가 아이를 낳으니 아들이었다. 혈손을 보전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데리고 있던 노비가 딸을 낳자 서로 바꾸어 그 이름을 박씨 성을 가진 노비라는 뜻으로 [박비]라고 짓고. 아들을 노비로 둔갑시켜 혈통을 보전한 것이다. 박비가 장성한 후인 조선 성종 때, 아버지와 동서지간이던 이극균이 경상 감사로 내려와 자수를 권유하자 임금을 찾아가 박팽년의 자손임을 이실직고하였다. 성종은 크게 기뻐하면서 특사령을 내리는 동시에 이름도 박일산으로 고쳐 주었다. 이리하여 은둔의 세월은 막을 내리고 묘골이 충절의 본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도 마을 한옥들에는 사람이 거주하고 있어 마을 전체가 잘 관리되고 있으며, 마을에는 묘골 박씨들의 전통을 자랑하는 육신사와 달성 태고정, 도곡재, 달성 삼가헌 등의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소암서당

10.4 Km    1242     2023-12-13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지산로 807-11

소암서당은 투암 채몽연(1561~1638), 백포 채무(1588~1670), 극명당 장내범(1563~1640)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서원이다. 1703년(숙종 29) 유학자인 장벽, 장세휘, 박정석 등 20여 명이 소암동 팜암바위 뒷산에 사당과 강당을 지어 소암사라 하고 같은 해, 1712년(숙종 38)에 투암, 백포 부자를 봉안하였다. 1803년(순조 3)에 서원으로 승격하고 1847년(헌종 13)에는 극명당을 배향하였으나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모두 훼철되었다. 이후 1932년, 강당을 복원하고 이를 소암서당이라 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강당 대청 상부에는 기문 등이 남아 있다.

도곡재

10.4 Km    15597     2024-02-05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60

도곡재는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들이 세거하는 달성군 하빈면 묘골마을에 있는 사랑채로, 1778년(정조 2) 대사성 서정 박문현이 주택으로 건립하였다. 19세기 중엽 도곡 박종우가 공부방으로 사용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도곡재는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 구성은 오른쪽으로부터 전면 툇간과 연결된 1칸 골방과 2칸 온돌방을 두고, 1칸 마루방과 1칸 누마루를 연접시켰다. 1칸 마루방과 1칸 누마루 사이에는 사분합 들어열개문을 달았다. 누마루는 후대에 툇간을 달고 대청을 넓혀 누처럼 꾸몄으며, 삼면 개방에 상부는 다락형으로 꾸미고 가적 지붕을 얹었다. 사랑채의 각 기둥에는 납도리를 얹어 장식성이 없는 소박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도곡재는 전체적으로 전통 한옥의 일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소박한 건물로, 사랑채나 안채의 외형 등을 집주인의 필요에 따라 융통성 있게 변형시켜 사용하는 사례를 보여 주는 건물이다. 도곡재가 위치한 묘골마을은 사철 아름다운 풍광과 곳곳에 박팽년과 관련된 육신사, 태고정 등 문화유산이 분포하여 먼 걸음이 보람될 수 있는 장소이다.

달성 태고정

10.4 Km    22787     2024-02-05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64

달성태고정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건축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항상 바르고 올곧게 살자는 뜻에서 일시루라고도 한다. 대청에는 윤두수의 한시를 새긴 현판과 정유재란 후 이곳에 온 명나라 선무관이 남긴 현판 등이 걸려 있다 네모난 모양의 단 위에 서 있으며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가구나 세부 가공이 정교할 뿐만 아니라 초익공계의 정교한 가구 구성을 갖추었기에, 건축사적 가치를 지닌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태고정 주변으로 도곡재와 육신사, 충효당이 있으며 사육신기념관을 방문하여 사육신과 박팽년에 대한 전시 및 영상 자료를 관람할 수 있다.

육신사

10.4 Km    35480     2024-03-15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64

육신사는 조선 세조 때 사육신으로 일컫는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처음 사당을 지을 때는 박팽년(醉琴軒 朴彭年) 선생만을 모셔 제사 지냈으나, 선생의 현손인 박계창이 선생의 기일에 사육신이 사당 문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로 나머지 5위의 향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숙종 17년인 1691년 낙빈사를 지어 이들을 봉안하고 제사 지냈으나, 서원 철폐령으로 낙빈사가 서원과 함께 철거되었으며,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1974년부터 1975년 사이 [충효 위인 유적정화사업]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 육신사로 이름을 붙여 재건하였고, 2003년부터 2011년에 걸쳐 충절문을 세우고 건물을 복원하였다. 이후 향사는 육신사에서 지내고 있다. 현재 육신사에는 숭정당, 숭절당, 사랑채, 외삼문, 내삼문 등의 건물과 보물 제544호로 지정된 달성 태고정과 태고정 안채 등이 남아 있다. 달성 태고정은 1479년 박일산이 태건립한 것으로 종택에 딸린 별당 건물이다. 이 밖에 사육신 육각비를 비롯하여 박정희 대통령, 최규하 대통령, 박준규 국회의장의 기념 비석, 헌성 방명록 비, 제13·14·15대 국회 의장 송산 박준규 생가 터 표석 등이 세워져 있다. 묘골 아름 마을 입구에는 사육신 기념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