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관광지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신륵사관광지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신륵사관광지

신륵사관광지

2.2 Km    26038     2018-11-29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 역사체험과 휴양을 동시에, 신륵사관광지 *

신륵사는 아름다운 경관과 많은 유물·유적들을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고, 고려 우왕 2년(1376년)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신륵사를 일명 "벽절" 이라 부르게 한 다층전탑이 묵묵히 여강을 굽어보고 있으며, 나옹선사의 당호를 딴 정자 강월헌(江月軒)에서는 그 옛날 시인 묵객들이 시 한 수를 읊고 있는 것 같다. 신륵사는 남한강변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다양한 유물 등 볼거리를 기반으로 1977년에 관광지로 지정되었으며,이후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고 있다.

신륵사(여주)

신륵사(여주)

2.3 Km    54118     2019-04-19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 다양한 유물이 숨쉬고 있는 고찰, 신륵사 *

신륵사는 여주읍에서 동북쪽으로 약 2.5km 정도 떨어진 남한강 상류 봉미산 기슭에 있는 오래된 전통 사찰로,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전한다.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1858년 헌종의 조모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호조판서 김병기(金炳冀)에게 명하여 절을 크게 중수토록 하였는데 이때부터 영릉의 원찰로서 의미가 약해지면서 다시 신륵사라 부르게 되었다. 근. 현대사에 있어 신륵사의 활동은 크게 알려지지 않으나, 1925년 열반당 14칸을 새로 짓고, 1929년 강성인(姜性仁) 스님이 주지 재임시 김인주(金仁柱)가 화주(化主)로 명부전을 중건하였다.

* 신륵사의 유래와 전설 *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났는데, 이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워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다.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 신륵사의 다양한 문화 유물 *

신륵사 인근 강가쪽 암반 위에 벽돌로 쌓은 다층 전탑이 있어서 고려 때부터 벽절이라고도 불렸다. 나옹화상이 이 절에서 입적을 했고, 그의 보제존자석종은 1379년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 말의 대표적인 부도 양식을 띠고 있다. 성종 옆에 있는 석종비문은 목은 이색이 썼다. 역사가 깊고 규모도 웅장하며 주위의 경관도 뛰어난 사찰로 경내엔 화려한 극락전을 비롯, 조사당 명부전, 다층석탑, 다층전탑, 석종, 대장각기비 등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8점을 보유하고 있다.

[문화재 정보]
1)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호)
2)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3)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4)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보물 제228호)
신륵사 조사당 근처의 구릉에는 석종 하나가 그에 딸린 비 및 석등과 함께 세워져 있다. 이것은 고려 말 공민왕 때에 왕사를 지낸 보제존자 나옹화상(1320∼1376)의 사리를 모신 부도이다. 종 모양의 형태를 하고 있어서 석종으로 불린다. 이곳에 석등까지 세워져 있는 것은 나옹화상의 위상이 그만큼 높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고려말의 대표적인 석종 부도로서, 이전의 팔각원당형 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의 선구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석종형 부도는 통도사·금산사·용연사·봉암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은 계단탑 형식을 한 통도사·금산사의 양식과 비슷하다. 석종의 높이와 지름은 각각 1.9m와 1.1m이다.
5)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6)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7)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보물 제231호)
8) 신륵사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여주 황포돛배

여주 황포돛배

2.7 Km    40816     2019-09-06

경기도 여주시 강변유원지길 105

※ 우천 또는 결빙 등 기상악화시 운항 중지
※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하고, 승선신고서 작성하여야 탑승 가능

황포돛배는 말 그대로 누런 포를 돛에 달고 그 바람의 힘으로 물자를 수송했던 배이다. 여주는 국토의 대동맥을 연결하는 한강의 상류지류인 남한강을 끼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특색으로 인해 조선시대 4대 나루 중 이포와 조포나루를 보유하고 있다. 이포와 조포나루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물자교역의 핵심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주는 물자 교역이 번성하였던 중심 상업도시로서 가치가 있는 고장이라 할 수 있다.

황포돛배는 대부분 0.4t에서 0.5t 정도의 작은 배로 어업이나 물자 수송 등에 쓰였다. 몸통은 스기나무로 만들고 노는 쪽나무로 만들며, 돛대는 죽나무와 아주까리나무로 만든다. 돛대는 6m 정도로 길게 세우고, 황토를 물들인 기폭을 매단다. 가로 2m 50㎝, 세로 6m의 기폭을 황톳물에 담가서 물을 들인 후에 잘 말려서 사용한다. 황톳물은 두세 번 반복하여 들인다. 한번 마련한 기폭은 2~3년 정도 사용할 수 있다.

조선효종영릉재실

조선효종영릉재실

2.8 Km    20546     2019-09-05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10

* 조선시대 재실의 형태가 보존되어 있는, 조선효종영릉재실 *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대왕(1619~1659, 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며, 재실(齋室)은 제관(祭官)의 휴식, 제수장만 및 제기 보관 등의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다. 효종대왕릉은 1659년 경기도 양주군 건원릉(현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의 서쪽에 조성하고, 능호를 익릉(翼陵)이라 하였으며, 그 앞에 재실을 건립하였다. 이후 1763년 석물에 틈이 생겨 현 위치로 옮겨오면서 능호를 영릉으로 고치고 재실도 함께 옮겨왔다.

* 조선효종영릉재실의 구조와 역사적 의의 *

일반적인 조선시대 재실은 재방, 안향청, 제기고, 전사청, 행랑채(대문 포함), 우물 등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되어 원형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이곳 영릉 재실은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고, 공간 구성과 배치가 잘 되어 있다. 또한 경내의 재향과 관계 있는 향나무와 느티나무, 회양목(천연기념물 제459호) 등의 고목도 함께 어우러져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대표적인 조선시대 재실건축으로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문화재 정보]
지정번호 : 보물 제1532호
지정연도 : 2007년 11월 29일
시대 : 조선시대
종류 : 가옥

세종대왕 역사문화관

세종대왕 역사문화관

2.8 Km    0     2019-10-07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10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은 사적 제195호인 조선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대왕의 영릉(寧陵)이 있는 경기도 여주에 위치하고 있으며, 3개의 상설전시실과 1개의 기획전시실, 영상실, 카페, 수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세종대왕과 효종대왕 그리고 조선왕릉에 대한 이해를 돕고, 세종대왕께서 후손에게 남긴 훌륭한 업적들과 그 업적의 바탕이 된 애민정신을 느껴볼 수 있도록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로 꾸며져 있다.

<출처 : 세종대왕유적관리소>

명성황후 생가

명성황후 생가

3.7 Km    43308     2018-08-07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 71

* 명성황후 생가에 대하여 *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비 명성황후(1851∼1895)가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1851)에 태어나 16살에 고종의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정치에 참여하여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갔으나,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능은 청량리에 있었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홍릉으로 함께 합장되었다.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 13년(1687)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 1996년에 안채는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집이다.

* 명성황후 기념관에 대하여 *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건립하였으며 명성황후(明聖皇后, 1851~1895) 생가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전시실은 면적 520㎡로 명성황후와 고종의 어진 등의 유물·같은 시기에 활약하였던 여흥 민씨들의 유물과 관련 자료들을 전시한다. 명성황후의 친필과 시해당일 일본인이 사용했던 일본도(복제품), 시해장면을 재현한 매직비젼 영상물 등 당시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옆에 있는 161석의 공연장에서는 명성황후와 관련된 영상물을 단체 관람객들에게 상영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명성황후의 개화사상과 민족 자주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명성황후 조각공원을 조성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생가 옆에 “명성황후탄강구리”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어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 옆에는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 선생의 신도비가 있고, 그곳으로부터 우측 산쪽 150m 지점에 그분의 묘가 있다.

명성황후숭모제 2018

명성황후숭모제 2018

3.7 Km    6124     2018-10-15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 71
031-881-9730

우리역사의 한시대를 장식했던 명성황후의 넋의 넋을 위로하고 왜곡된 명성황후의 올바른 인식과 업적을 재조명함으로써 찬란하고 뿌리깊은 우리 민족문화의 얼을 되살려 전통문화를 함께 느끼며 계승, 발전시키고, 민족적 자긍심의 회복과 가치관을 정립코자 매년 11월 17일 탄신일을 기념하여 숭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여주컨트리클럽

3.3 Km    21618     2018-03-08

경기도 여주시 월평로 78
031-883-7000

여주컨트리클럽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명문 코스로 총면적 380,810평에 코스전장 9,444m로 라이트시설이 완비되어 있고, 페어웨이가 넓어 장타를 구사할 수 있는 웅대한 국제 수준의 명문 골프장이다.
페어웨이가 넓어 장타를 부담없이 칠 수 있으며 대체적으로 거리가 짧고 경사가 완만하여 아마추어 골퍼에게도 부담이 없는 코스이다.

여주 영릉(英陵)세종대왕)과 영릉(寧陵)효종,인선왕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3.4 Km    55184     2019-10-07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

※ 세종대왕릉 일부 구역 관람 제한
※ 제한기간 : 2017.11.01~2020년 말
※ 제한구역 : 세종대왕릉 전역
※ 관람구역 : 효종대왕릉, 세종대왕, 역사문화관
※ 관람료 : 무료입장

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왕으로 1418년부터 1450년 54세로 승하하실 때까지 32년간 재위하였다. 태조6년(1397년) 음력 4월10일(양력 5월15일) 조선조 제3대 임금이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태종8년 (1408년) 음력 2월11일(양력 3월17일)에 충녕군에 봉해지고, 같은 해 2월 16일(양력 3월22일) 우부대언 심온의 딸(소헌왕후 심씨)과 결혼하였다. 태종12년(1412년)에 충녕대군에 진봉되고 스물두살 되던 태종18년(1418년) 양녕대군이 폐세자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그 해 음력 8월10일 (양력 9월18일) 22세의 나이에 조선조 제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종이 맏형인 양녕대군을 두고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여러 왕자중에서 가장 총민하고 현명하였기 때문이었으며, 대왕은 우리나라 역대 군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민족의 원형을 이루었던 우리 민족은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 국토·언어·문화·민족정신을 공통으로 하는 완전한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 영릉의 특징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낸 능의 하나인 영릉의 구조를 살펴보면 풍수지리설에 따라 주산인 칭성산을 뒤로 하고, 중허리에 봉분을 이룩하며, 그 좌우 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능역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신도를 따라 정자각에 이르게 된다. 정자각의 동쪽에는 수복방과 비각, 서쪽에는 수라간이 있다.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돌렸으며, 난간석을 바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앞에는 합장릉임을 알 수 있는 2개의 혼유석과 장명등을 놓고, 좌우에 망주석을 세웠다. 봉분 능침 주변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서로 엇바꾸어 좌우로 각각 두 쌍씩 여덟마리를 밖을 향하여 능을 수호하는 형상으로 배치하고, 봉분의 동·서·북 3방향에 곡담을 둘렀다. 봉분앞 한층 낮은 단에 문인석 2쌍과 무인석 2쌍을 세우고 문·무인석 뒤에는 각각 석마(石馬)를 배치하였다.

* 전시유물

정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건립한 유물전시관인 세종전이 있으며, 세종전에는 세종대왕의 어진과 당시에 발 명하여 사용한 과학기구, 악기류와 세종대에 간행된 책들이 함께 진열되어 있다. 세종전 앞 야외유물전시장에는 해시계, 천상열차분야지도, 자격루, 관천대, 측우기, 혼천의, 간의 등 15점의 각종 복원유물들이 전시되어있어 세종시대의 과학기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 행사안내

문화재청은 대왕의 탄신일을 맞아 매년 양력 5월 15일(오전 10시 30분) 세종대왕의 유덕과 위업을 기리는 숭모제전 행사를 국가행사로 개최하고 있으며,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각계 주요인사, 세종대왕위업 선양단체, 일반 관람객이 참석하여 세종대왕릉 정자각에서 봉행하는 데 2002년에는 탄신 605돌이 된다. 탄신 다례행제 에는 대왕이 친히 지으신 봉래의를 국립 국악원 연주단 및 무용단데 의해 공연되며, 해마다 세종시대의 과학유물을 복원하는 제막식을 거행한다. 또한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영릉봉향회 주관으로 세종대왕 승하일 기신제는 매년 양력 4월 8일 정오 12시에 종친관계자 300여명의 참석으로, 소헌왕후 기신제는 매년 양력 4월 28일 정오 12시에 각각 개최된다.

* 세종대왕의 업적

1) 한글창제
대왕은 궁중에 정음청을 두고 집현전 학사들을 지도하여 1443년(세종25년) 훈민정음 28자를 연구·창제하고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연후인 1446년 9월(음력) 에 이를 반포함으로써 민족적 주체성을 통한 우리 민족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오늘날 한글은 그 원리나 형태가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며, 익히기 쉽고 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로 평가되고 있다. 한글 창제의 더 큰 의의는 한문을 무조건 숭상하던 많은 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와 백성의 앞날을 위하여 우리의 글을 만들어 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2) 학문창달
대왕은 특히 학문을 사랑하여 집현전을 부활하여 우수한 젊은 학자들로 하여금 학문을 강론하고 옛 제도를 연구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토록 하였다. 우선 경자자· 갑인자· 병진자 등 개량활자를 만들어 월인천강지곡·용비어천가·농사직설·고려사·삼강행실도·팔도지리지·석보상절·의방유취 등 귀중한 책을 간행하고, 경제육전을 반포하여 농업을 크게 장려하여 전제(田(전)제)와 세제를 정비하는 등 문물제도를 크게 개건하였다.

3) 과학의 진흥
대왕은 국민을 위하여 농업을 진흥하려는 데 뜻을 두고 한 평생을 천문, 지리 등 과학기술을 연구 보급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장영실, 이천 등 젊은 과학자들을 격려하여 천문관측기구인 대·소간의, 일성정시의, 혼천의, 시간을 재는 앙부일구(해시계)와 자격루(물시계)등 을 만들었다. 또한 측우기를 제작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강우량을 측정토록 했으며 수표를 만들어 하천의 수위를 재게하고 외국의 역법(曆法)을 참작하여 역서와 천문도를 제작했다. 이리하여 천문·지리 등 과학기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4) 외치와 국방
대왕은 역대로 신사상과 신기술의 통로였던 중국의 명나라와의 교류정책을 적극 펼치는 한편 바다를 건너와 백성을 괴롭히는 왜구를 응징하여 이종무 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는 한편 3포를 개항하여 일본과의 선진관계를 도모하였다. 북방으로는 최윤덕으로 하여금 평안도의 야인을 평정케하여 4군을 설치하고 김종서로 하여금 함경도에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우리나라의 국경을 확정시키는 등 국력을 강하하였다.

5) 음악의 정리
조선 초기 까지의 음악은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던 음악과 중국음악이 서로 혼합되어 무질서한 상태였으나 세종대에 이르러 정리하였는 데, 이는 아악의 부흥과 향악의 창작이었다. 대왕은 박연 등으로 하여금 각종 악기를 만들게 하고 특히 편경과 편종을 새로 제작하였으며, 악곡·악보 등을 종합 정리하여 바로잡아 아악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묘, 효종대왕릉

영릉(寧陵)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1618∼1674)의 무덤이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 (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懿陵)도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

* 효종대왕릉의 형태

조선왕조 왕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전환기가 된 형태로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왕릉 바깥쪽으로 나지막한 담을 쌓았고, 봉분을 감싸고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돌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동자석(童子石)에는 십이방위 문자를 새겼다. 조선시대 왕릉의 형태를 보면 세조 때부터 병풍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있었으나, 성종의 무덤인 선릉(宣陵)부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석을 설치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영릉(寧陵)에서 다시 사라져 왕릉 배치에 있어 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능에 갖추어진 석물은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 각 1쌍이다. 왕비릉에는 곡장만 없을 뿐 다른 배치는 왕릉과 똑같이 구성되어 있다.

* 대동법과 상평통보, 효종에 대하여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1619년(광해군 11) 5월 22일 태어나 1626년(인조 4)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로 8년간이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그 후 풀려 나와서 1646년(인조 23) 소현 세자가 변사하자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고 1649년(인조 27) 5월 13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즉위 후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를 널리 보급하였다. 조선왕조가 당한 굴욕을 씻고자 청나라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일 재위 10년 만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남한강을 따라 흩어진 역사의 향기

3.4 Km    4253     2016-09-27

여주 남한강변을 여행하는 것은 긴 세월에 걸친 역사와 조우하는 일이다. 그 만남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운치 있어 더욱 오래 마음에 남는다. 세종대왕과 소현왕후의 무덤인 영릉과 효종과 인선왕후의 무덤인 또 다른 영릉, 남한강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영월루와 신륵사, 고달사지와 파사성에 이르며 남한강변의 아름다움도 함께 누린다.

명성황후 기념관

3.7 Km    21400     2018-08-07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 71

* 민비 명성황후를 만나자, 명성황후 기념관 *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건립하였으며 명성황후(明聖皇后, 1851~1895) 생가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전시실은 면적 520㎡로 명성황후와 고종의 어진 등의 유물·같은 시기에 활약하였던 여흥 민씨들의 유물과 관련 자료들을 전시한다. 명성황후의 친필과 시해당일 일본인이 사용했던 일본도(복제품), 시해장면을 재현한 매직비젼 영상물 등 당시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옆에 있는 161석의 공연장에서는 명성황후와 관련된 영상물을 단체 관람객들에게 상영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명성황후의 개화사상과 민족 자주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명성황후 조각공원을 조성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생가 옆에 “명성황후탄강구리”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어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 옆에는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 선생의 신도비가 있고, 그곳으로부터 우측 산쪽 150m 지점에 그분의 묘가 있다.

기념관 주변에는 주차장과 공중화장실·연못 등 편의시설이 있고, 앞마당에는 명성황후의 자주정신과 개화사상을 추모하기 위한 조각공원이 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의 생가 *
조선 제26대 고종 황제의 비로 개화기에 뛰어난 외교력으로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시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에 의해 시해당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던 명성황후가 출생하여 8세까지 살던 집이다. 1687년(숙종 13년) 왕의 장인 민유중의 묘막(墓幕)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서 남아있는 것은 안채 뿐이었으나,1995년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됨으로써 면모가 일신되었으며, 명성 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했다는 방이 있었던 자리에 탄생을 기념해 세운 "명성황후 탄강구리 (明成皇后 誕降舊里)"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 이라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생가 앞에 기념관이 건립되어 각종자료·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161석 규모의 공연장(문예관)이 있어 명성황후에 대한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다.

한강 문화관

4.1 Km    3210     2019-05-10

경기도 여주시 신단1길 83

강물따라 이야기가 흐르는 곳
한강문화관은 물 부족과 환경재해에 대한 인식을 고취하고자 설립되었다. ‘오천년 풍류를 누리다’를 주제로 한강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고, 옛사람들과 강변의 풍류를 나누는 감성체험, 물방울로 소통하는 율리어스 포프의 미디어아트 등 물과의 환상적인 만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