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진천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진천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진천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0m    22879     2019-12-27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김유신길 170-4

이곳은 흥무왕 김유신 장군이 탄생한 곳으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3세손이다. 김유신 장군은 만노군 태수(萬弩郡 太守,만노: 진천의 옛이름) 김서현(金舒玄) 장군의 아들로 진평왕 17년(595년) 진천읍 상계리 계양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15세 되던 609년(진평왕 31년)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선덕여왕 때 상장군(上將軍),무열왕 7년(660년)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당군(唐軍)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668년)하고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되었으며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다시 찾아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여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지금의 계양(桂陽) 마을 입구에 장군터(태수 관저가 있던 곳)라 불리워지는 곳에 1983년에 유허비(遺墟碑)를 건립하였으며, 이곳에서 북서 방향 2㎞ 지점에는 태수 관저에서 사용했다는 우물터 연보정(蓮寶井)이 현존하고 있으며, 무술 연습을 했다고 전해오는 투구바위와 치마대가 있다.

* 시대 - 삼국시대

진천의 문화유산을 찾아 떠나다

진천의 문화유산을 찾아 떠나다

52m    4248     2016-09-27

진천은 삼국통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낸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가 있는 곳이다. 보탑사의 목탑도 이곳에 오면 한번쯤은 봐야할 유적지고, 국내 유일의 종박물관도 볼만하다.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체험이 준비되어 있다.

출처 : 머물수록 매력있는 충청

연곡저수지

연곡저수지

1.4 Km    24875     2020-10-06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진천읍 상계리에 있는 김유신탄생지를 들러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위쪽으로 올라가면 산속에 자리하고 있는 조용한 저수지를 만날 수 있는데 이곳이 연곡저수지이다. 연곡저수지는 총 저수량 920톤 정도의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주변 자연환경이 아늑하고 고요해서 혼자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으며 겨울이면 가족들이나 연인들끼리 얼음낚시를 즐기러 많은 사람이 오기도 한다. 또한, 연곡저수지를 지나 약 20분 정도 숲길을 걸어가면, 길이 끝나는 곳에 보탑사가 위치해 있는데 이곳에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지었다는 3층 목탑 (통일대탑)이 있어 내부 계단을 통해 3층까지 올라가 주변 경관을 시원하게 둘러볼 수 있다.

연곡계곡

연곡계곡

1.8 Km    37767     2020-10-06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043-539-3114

진천주둔부대가 있는 사석에서 약 10km 가량의 유서깊은 계곡이다. 상류의 만뢰산과 연곡저수지에서 흘러 내려오는 맑은 물과 숲이 우거져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많이 찾아와 더위를 식히는 곳이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보면 상계리에서 삼국 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신 김유신장군의 탄생지가 있으며 연곡리의 통일대탑 보탑사를 들러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다. 더불어 진천의 고봉 만뢰산 등산도 해봄직하여 가을이면 수려한 주변 경관이 더욱 감탄을 자아낸다.

연제 안승갑 고가

연제 안승갑 고가

2.1 Km    17087     2019-12-11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보련골길 46

연제 안승갑(1887~1951)고가는 진천의 진산 만뢰산 아래 연화부수형 보련마을의 중심자리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전통 가옥구조를 계승하여 1900년대 초에 건축한 'ㄱ字形' 돌기와 팔작지붕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 반으로 부분적인 겹집형태로 본채의 구조는 좌측(서쪽) 으로부터 반 칸의 뒤주가 부엌에 이어져 있고 안방과 윗방, 대청이 있다. 대청마루는 널찍하고 매 칸마다 여닫이문을 설치하여 상당히 개방적이며, 부엌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크기로 전면 앞마당과는 쌍여닫이 판문으로 연결 되어있다.대문과 광은 본채와 직각으로 배치되어 정면 3칸 측면 1칸 크기로 각 칸을 사이벽으로 구획하고 간략한 토벽구조로 축조 되었으며, 본채와 아래채 사이에는 좌로부터 외양간, 변소, 잿간, 헛간으로 구성된 건물 1동이 자리 잡고 있다. 연제 안승갑 선생은 1934년부터 1942년까지 현 화랑문화학교 자리에 안중근의사의 재종질 등 민족혼이 투철한 선생을 초빙하여 한글, 우리역사, 민족사상등을 교육하던 만뢰학원을 사비로 설립.운영하였다.

진천 생거진천화랑촌

진천 생거진천화랑촌

2.1 Km    21934     2019-07-25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보련골길 40-4

예로부터 '생거진천(生居鎭川)'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토지가 비옥하여 산물이 풍부하고, 인심이 후덕한 살기좋은 고장, 진천에 위치한 우리 마을은 아름다운 연곡저수지와 계곡, 그리고 호두나무와 밤나무로 어우러져 있는 작은마을로 효자효부가 많아 조선시대부터 효자마을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불리고 있다. 마을 뒷편으로는 진천에서 제일 높고 경관이 수려한 만뢰산(611.7m)이 위치하고 있어 항상 등산객들로 붐비고 있으며 또한,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김유신장군의 탄생지와 남북통일 기원탑인 보탑사가 마을 인근에 있어 화랑도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곳 그래서 더욱 유명한 마을이다.

충·효·예의 화랑정신이 살아숨쉬는 아름다운 연곡 저수지와 계곡, 호두와 감나무로 어우러져 있는 작은 마을 화랑촌은 효자효부가 많아 조선시대부터 효자마을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그 이름이 알려진 곳이다. 또한,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김유신장군의 탄생지와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동양 최고의 목조건물인 보탑사가 마을 인근에 있어 화랑도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마을이다. 마을뒤로는 진천에서 제일 높아 서해바다가 보인다는 만뢰산(611.7m)이 위치하고 있어 항상 등산객들로 붐비고 참숯이 유명하여 숯 굽는 체험과 숯 생활용품을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보탑사(진천)

보탑사(진천)

3.1 Km    33053     2019-12-24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김유신길 641

충북 진천군 진천읍의 보탑사는 고려시대 절터로 추정되는 곳에 대목수 신영훈 장인의 감독하에 창건된 절이다. 보탑사가 주목받는 이유는 신라시대 황룡사 구층목탑을 모델로 한 삼층목탑 양식이기 때문이다. 상륜부를 제외한 목탑 높이가 42.73m이며 목탑을 떠받치는 기둥만 29개에 이른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걸어서 내부를 오르내릴 수 있는 목탑이라는 점도 특별하다. 못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목재를 끼워 맞추는 전통 방식을 고수했다. 1층에 사방불, 2층에 경전, 3층에 미륵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신라시대 이후 사라진 목탑을 재현했다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다리를 건너다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다리를 건너다

3.1 Km    2726     2017-09-19

진천에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다리가 있다. 돌무더기 여러 개가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농다리는 돌을 쌓아 만든 다리로 동양 최고로 알려져 있다. 진천은 신라통일의 일등공신인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고장으로 탄생지의 뒷산인 태령산은 김유신의 태를 묻었다고 전해지는 산이다.

진천 연곡리 석비

진천 연곡리 석비

3.2 Km    17211     2020-01-15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김유신길 641

연곡리 사지는 진천읍 연곡리 비립마을 바로 뒤에 있으며, 건립 당시의 절 이름이나 연대, 훼손년대 등을 알 수 없다. 현재는 삼층석탑이 남아 있고, 그 인근의 연곡리 석비(백비) 등을 통하여 고려 때 절터로 추측된다. 현재 이곳에는 삼선포교원의 보탑사가 있다.진천읍 연곡리 비립동에 있는 "연곡리 석비"는 비석에 비문이 없어 일명 `백비"라고도 하며 비문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 마멸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형형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 또는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좌대는 거북 모양이고 이수는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려고 하는 모습인데, 그 조각솜씨가 뛰어나다.높이는 212.5cm, 폭 111.8cm, 두께는 22.2cm이며, 1964년 9월 3일 보물 제404호로 지정되었다. 석비 옆에는 석불좌상과 사리탑으로 추측되는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현재 이 앞에는 전통적인 공법으로 목탑을 재현하는 등 현대의 불교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보탑사가 건립되어 많은 참배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보련마을

2.3 Km    1733     2019-10-29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보련골길 41-22

보련마을은 만뢰산 깊은 품 안에 들어와 있다. 보련마을은 화랑촌이라고도 불리는데 그건 바로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이 이 지역 출신이기 때문이다. 천연염색을 위해 우리는 안승갑 고가로 이동했다. 안승갑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사비로 한글과 역사를 가르치는 학교를 마을에 설립하셨던 분이라고 한다. 천연염색은 꽃이나 식물, 과일 등을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한다. 보련마을에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식당인 연꽃가든이 있는데 이곳은 맛집이기도 하다. 보련마을의 숙소는 마치 펜션같이 생겼다. 보련마을에 들러 체험도 하고, 맛집에서 식사 후 숙박해 보길 추천 한다.

만성사(문수암)

2.5 Km    22707     2019-10-14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금사로 252-106

만성사(문수암)는 진천의 미륵산 중턱에 있으며, 근처로 천안과 진천을 오가는 국도가 조성되어 있어, 쉽게 만성사 주위에 다다를 수 있다. 만성사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미륵산에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6교구 마곡의 말사이다. 사찰명이 만성사이나 사찰 주변 이정표등에 기록된 사찰명은 “문수암”이라고 되어 있다. 만성사라는 사찰명은 수많은 사람들이 성인이 되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로 명명된 것이라 한다. 만성사는 미륵사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산의 이름이 미륵산이라고 붙여진 연유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으나 이 산봉우리에서 석불입상이 발견되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현 만성사가 창건되게 되었다. 석불은 고려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이곳에는 최소한 고려초에 사찰이 경영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고, 이 사찰이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석불만이 자리를 지키며 일반인의 예불 대상으로 계속 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만성사가 조성되게 된 시기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1960년대에 외롭게 산을 지키고 있던 불상이 인연이 되어 석불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새롭게 사찰을 조성했다. 그리 넓은 터전은 아니었지만 이곳에 작은 법당을 짓고 여기에 기거하면서 부처님의 뜻을 펴기에는 결코 좁은 터전이 아니었다. 사찰이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쉽게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고, 많은 참배자들이 찾아와도 이들을 수용할 시설이 미비해 불편했으나 수많은 신도들이 연일 만성사를 찾게 되었다. 이러던 중 성원스님의 노력으로 법당을 중수하고, 요사를 짓고, 진입로를 개설하면서 현재는 많은 신도들이 쉽게 편하게 사찰에 참배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는 정면 2간, 측면 1간이었던 작은 법당을 새롭게 중창하여 사찰의 면모를 새롭게 갖추었다.

만성사의 창건 연기가 된 석불입상은 현재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21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절의 왼쪽편에는 만성사의 창건 및 중건에 온힘을 다한 성원스님의 부두가 조성되어 있다. 만성사는 거대하게 조성한 다른 사찰들과 다르게 작고 아담한 풍모를 지니고 있는 사찰이다. 작은 국에 자리잡고 있고 새롭게 대웅전을 조성하는데 있어서도 결코 화려하거나 돋보이게 장식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서한순 효자문

2.6 Km    24486     2020-01-15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이 효자문은 조선 헌종 14년(1848)에 태어나 순종(純宗) 3년(1909)에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직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일생을 마친 서한순의 효행을 길이 후세에 기리기 위해 1971년 6월 6일에 건립한 효자정문(孝子旌門)이다. 목재를 이용한 기와집 형태로 규모는 9.9174㎡이며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서 공(徐 公)은 본관이 달성(達成)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예절바르고 웃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평생을 부모에 대한 효성으로 보냈다. 집안이 가난하여 끼니 마저도 거르는 때가 많았으나 부모님에 대한 봉양은 게을리 하지 않고 부친이 병상에 눕게 되자 갖가지 약을 구하여 간호하였으나 차도가 없으니 혹한도 아랑곳 않고 매일 목욕 재계하고 하늘에 치성을 드리며 시탕(侍湯) 간병한 결과 20여일만에 완쾌되니 인근에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후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매일 성묘하고 곡(哭)을 하며 시묘(侍 墓) 3년으로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 후 지방의 유림(儒林)들의 건의로 효자문을 세우도록 품신(稟信)하였으나 조선조 말엽의 혼란과 외세침략으로 정려(旌閭)의 은전(恩典)을 입지 못한 채 내려오다 1971년에서야 지방 유림들이 당시의 감사(監事), 현감(縣監)등의 표창장을 자료로 효자정문(孝子旌門)을 세우게 되어 많은 사람들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