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사(장흥)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보림사(장흥)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보림사(장흥)

보림사(장흥)

0m    32250     2024-01-23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로 224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보림사는 1,300년(759년) 전에 창건한 신라시대의 거찰이다. 보림사는 신라 선문을 태동시킨 탯자리이면서 뒤늦게 선문을 개창한 중심 사찰이다. 보조 선사 체징(804-880)이 이곳으로 온 이래, 보림사는 초조 도의선사와 2조 염거화상(?-844)에 이어 보조국사 체징을 제3조로 삼는 가지산문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이곳에 처음 절을 지은 것은 보조선사 체징보다 약 100년 전쯤의 사람인 화엄종의 대가 원표 대덕이었다. 보림사는 탐진강의 상류에 접하고 있으면서 발달한 좁고 긴 산간 협곡의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가지산 자락의 울창한 비자나무숲과 차밭에 둘러싸인 보림사는 규모가 큰 사찰이다. 절 입구의 사천왕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우리나라 사천왕상의 기본이 되었다. 또한, 보림사 경내의 한가운데에서 솟아나는 보림 약수는 물맛 좋기로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한다. 주변에 야생 차나무가 많아 장흥 사람들이 차 모양이 엽전과 비슷하다고 해서 돈차라고 불리는 청태전이라는 전통 발효차가 제작되고 있다.

개천사 비자나무숲

개천사 비자나무숲

10.1 Km    4     2024-01-29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개천사 비자나무숲은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에 있는 비자나무 자생지이며, 비자나무숲을 개천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과거 이곳 사찰 주변에 조성했던 비자나무가 확산한 숲으로 화순 개천산과 천태산 개천사 주변에서 자생하고 있다. 비교적 넓게 분포하며, 생육상태 또한 양호한 비자나무 군락이다. 이 지역에는 수령 300년, 가슴 높이 줄기 둘레 2m 이상 되는 비자나무가 약 300주 정도 있는데, 특히 개천사 북쪽에 있는 한 그루는 수령 4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오래된 나무이다. 예로부터 비자나무는 귀하게 여겨져서 민가에서 많이 심었는데 열매는 구충제로 쓰거나 기름을 짜서 식용유, 등유, 도료 등으로 이용하였고, 목재는 건축재, 조선재, 가구재나 바둑판 등 여러모로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개천사 비자나무숲은 분포 면적, 분포 본수, 생육상태 등이 매우 양호한 군락으로, 학술 가치가 크며, 생장이 느린 비자나무로서는 규모와 발달 정도가 우수한 지역이다. 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있으며 평탄한 산책로와 숲길 그리고 조금은 숨차 오르는 오르막길이 함께 있어 등산화를 신고 걸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시간과 함께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여행지이다.

부춘정원림

부춘정원림

10.7 Km    27372     2023-05-25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부춘길 79

남평문씨 희개(希凱 : 호 청영(淸潁) 1550~1610년)가 정유재란 뒤 고향에 돌아와 세운 것으로 창건 당시에는 청영정(淸潁亭)이라 불렀다. 희개는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하였으며 정유재란 때는 고창현감으로 수성(守城)에 공을 세운바 있다.청영정은 헌종 4년경(1838)에 청풍(淸風)김씨 영동정공파(令同正公波)의 후손인 김기성(金基成)이 사들여 오늘과 같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실이 있는 팔작집으로 개축하고 이름도 부춘정으로 고친듯하다. 정(亭)의 서쪽에는 탐진강이 인접하여 남쪽으로 흘러가고 강안에는 붉은 소나무・푸조나무・개서어나무・단풍나무 등의 노거수가 수림을 이루어 수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또 정의 맞은편 강변에는 자미나무가 군식되어 여름철이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나 지금은 제거되고 제방이 축조되어 있다.

* 시대 : 조선시대
* 규모 : 정면 3칸, 측면 1칸, 팔작지붕
* 소유자 : 청풍김씨영동정공파

개천사

10.8 Km    19395     2024-01-30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변천길 389

화순 개천사는 통일신라 헌덕왕 말기(809-825년) 도의선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통일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모두 후대의 기록이라 확인하기 어렵다.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소실되었다가 복구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용화사로 불렸다. 천불전이 있었는데 1950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963년에 주지 김태봉이 주민들의 협조로 대웅전과 요사를 중건하였다. 1987년에는 당시 주지였던 희안이 주변에 흩어져 있던 다섯 개의 부도를 모아 비자나무 숲 아래에 부도 밭을 조성하였다. 사찰의 전각으로는 대웅전, 천불전, 침수루, 요사채 등이 있으며 청련암, 백련암 등의 세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여래가 독존으로 모셔져 있다. 천불전에는 200여 분의 부처가 봉안되어 있으며 1,000불을 봉안하기 위한 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인근에 위치한 개천사 비자림은 천 그루의 비자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산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는 형상을 한 거북바위의 전설을 품고 있는 화순의 숨은 명소다. 비자림 관광 자원화와 장소 활용을 위해 왕복 3.8km 구간의 탐방로를 조성했다.

하멜 체류지와 강진 성동리 은행나무

11.9 Km    24337     2023-09-11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하멜체류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일원으로 일본으로 이동 중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 일행 33명은 한양, 강진, 여수 등에 유배되어 살았는데 특히 하멜은 이곳 강진 병영에서 1656 ~ 1663까지 약 7년간 생활을 했다. 하멜 일행은 생계를 위해 잡역을 하거나 나막신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고 춤판을 벌여 삯을 받아 생활하였으며, 민간인, 승려들과 친밀하게 교류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나막신이 일본의 나막신과 달리 네덜란드와 같이 통으로 만들어진 것을 볼 때 이들이 나막신을 전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며, 이들이 남긴 빗살 무늬 돌담이 이 지역 일부에 남아있다. 하멜은 이곳 은행나무 밑에서 수인 산성을 바라보며 고향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1663년 병영 생활을 마치고 좌수여 12명, 순천 5명, 남원 등지로 5명이 분리 이송되었으며, 마지막 체류지인 여수에서 일행 중 7명이 1666년 9월 탈출 후 「하멜표류기」를 저술함으로써 조선에서의 생활을 최초로 서양에 알리기도 했다. 강진군은 2007년 12월에 하멜 일행의 조선 표류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고, 나아가 한국, 네덜란드 간의 문화적 교류 증대를 위하여 하멜기념관을 개관하였다. [강진 성동리 은행나무] 이 지역은 고려 시대에 도강(도강) 현의 행정 중심지가 있던 곳으로, 조선시대 태종 17년(1417)에 병마절도사 영을 둔 곳이다. 전라병영성으로부터 성동리 은행나무는 약 300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하멜기념관 부근에 자리 잡고 있다. 수령 800년쯤으로 추정하는 성동리 은행나무는 동성마을 중앙에 우뚝 솟아 마을의 상징목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 30m, 나무 둘레 6.75m이고 수형이 곧고 아름답다. 1656년부터 1663년까지 머물렀던 하멜의 표류기에도 은행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전라 병마절도사로 부임한 관리가 이 은행나무로 만든 목침을 베고 잠을 잔 뒤에 병이 났는데, 백약이 무효하였다. 그때 한 노인이 은행나무에 제사를 지내고 목침을 나무에 붙이면 병이 낫는다 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후로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2월 15일 자정에 은행나무에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전라병영성과 하멜기념관이 근거리에 인접해 있다.

활성산 풍력발전단지

활성산 풍력발전단지

12.0 Km    0     2023-10-26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활성산길 219-1

소문 소문으로 캠핑족들이나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기 위한 마니아들이 찾아오던 곳이다. 활성산은 498m 높이의 산으로 영암군 금정면에 위치하고 있다. 산의 명칭은 산 정상에 있던 활성산성에서 유래되었으며 현재도 토성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활성산의 정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좁은 임도를 따라 올라가야 하므로 내려오는 차를 마주칠 수 있어 속도를 줄이고 주의 운전을 하며 올라가면 된다. 오르다 보면 우거진 나무 사이로 풍력발전기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활성산 정상의 발전단지는 사유지로 관계자 외에는 출입을 통제하므로 출입 가능한 구역의 빈 공간에 주차하면 된다. 푸르름을 보여주던 서광목장이 초지는 사라지고 신재생 에너지 사업의 태양광 패널로 대치되었지만 하얀 풍력발전기와 어우러져 이질적이고 이국적인 산의 경치를 보여준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일부 공간을 통해 가까이 다가가면 압도적인 크기와 허공을 가르는 발전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웅장하다. 풍력발전기의 프로펠러 소리를 들으며 정상에서 조망하는 월출산과 영압읍의 경치가 경이롭게 다가온다.

강진 전라병영성

강진 전라병영성

12.1 Km    20490     2023-06-16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병영성로 175

조선조 600년 간 호남과 제주도 53주 6진을 통할한 육군의 총 지휘부로 1417년(태종 17) 본래 광산현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이설한 성이다. 초대 병사인 마천목장군이 꿈속에 계시를 받아 눈(雪)의 자국을 따라 축조하였다 하여 설성이라고도 하는데 평지에 축조된 성으로, "대동지지"나 "색지"등에 따르면 둘레 2,820척, 높이 18척, 옹성 12개소, 연못 5개소, 우물 9개소, 포루 2개소였고 성문 4개소, 연회장, 객사 등 15동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1599년(선조 32) 일시 장흥으로 이설되었다가 1604년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제주도에 표착했던 네델란드인 하멜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8년여 동안을 억류생활 했던 곳이다.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병영성이 함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때 폐영되었다. 전라병영성지는 당초 1992년 3월 9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다가 1997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당시의 성곽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중요성과 의의를 한차원 높이기 위해 성곽 등을 복원하였으며, 관련유적으로 하멜체류지, 한골목, 병영홍교, 비자나무, 은행나무 등이 있다.

하멜표류기의 흔적을 만나다

하멜표류기의 흔적을 만나다

12.1 Km    2971     2023-08-08

강진 전라병영성은 조선시대의 병마절도사의 영이 있던 곳이다. 병영성 곳곳에는 강진 병영마을 옛 담장,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성동리 은행나무, 삼인리비자나무, 병영성 홍교 등 볼거리가 제법 많다. 특히 이곳은 하멜표류기를 쓴 하멜이 머물던 곳으로 병영성의 옛 담장은 하멜식 담쌓기라 부르는 방식으로 쌓은 담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병영성과 병영마을, 하멜의 흔적까지 남아 있어 천천히 걸으며 둘러보기에 제격이다.

하멜의 표류기에 등장하는 강진 병영성과 바다낚시 여행

하멜의 표류기에 등장하는 강진 병영성과 바다낚시 여행

12.1 Km    3360     2023-08-09

강진의 옛 시절 군수권을 총괄하던 병영성을 돌아보는 코스다. 병영마을은 옛 병마절도사의 영(營)이란 명칭에서 유래된 마을로 오랜 역사 속에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병영성은 하멜이 표류하여 기거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국내유일의 청자박물관은 고려청자의 수집, 전시, 연구, 교육 등을 통하여 청자문화의 계승발전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병영성과 청자박물관을 모두 둘러보았다면 마량항의 바다낚시의 즐거움도 빼먹지 말자.

옴천사(강진)

12.2 Km    18934     2023-02-28

전라남도 강진군 옴천면 장강로 1445-14

강진 옴천사(구, 만연사)는 강진 옴천면 정정리 산정물에 위치한 사찰로 후삼국시대 송악에 고려 태조 왕건 부친의 터전을 잡아주고 후삼국 통일의 성주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신 신라 4대 고승 가운데 한 분이신 도선국사께서 영암 도갑사, 광양 백계산 옥룡사와 모친을 모시고 계셨던 광양 운암사와 비슷한 시기에 국사께서 창건하셨다던 설이 있는 옛 목암사터에 1960년도 안순희 스님께서 만연암을 창건하고 정진수도하던 도량이다. 스님의 입적 후 이곳 지명을 따라 옴천사로 개칭하여 대한불교 선각종 총본산으로 많은 스님들이 옛 목암사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열심히 수도정진하며 불사를 계속하고 있다. 옴천사의 옛 지명인 목암사가 이곳에 있었다는 근거는 많은 구전으로 전해왔고 지명으로도 우리나라에서 옴자가 들어가는 지명은 강진 옴천면이 유일한 것으로 봐서 이곳에 큰 가람이 있었다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원래 이 옴은 범어“AUM”의 음역자로서 헤브라이어의“아멘”과 같은 뜻의 불교의 신성어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의 첫 소리는 '옴(AUM)'으로 시작해서 '사바하(SVAHA)'로 끝나며, 진리의 형성을 뜻하는 창조·유지·파괴로 해석된다. 이는 옴천이 신성한 지역으로 조용하고 맑은 물이 있어 고승들이 불경을 외우고 참선할 수 있는 최적지라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옴천은 이른 바 절터골이었던 인근 성전 월출산 기슭의 배후에 있으며, 사동이나 좌척마을 등 곳곳에서 사찰의 흔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절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현 옴천사 회주이신 정암 스님께서도 안순희 스님께서 이곳 옛 목암사터에 만연암을 건립하실 때 이곳이 사찰이었음을 증명하는 많은 유물이 나왔다고 전해들었으며, 옴천사 인근에 조선시대 전라 병영성이 복원되었다. 지금의 옴천사는 여러 가지 설과 증거들로 봐서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목암사가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도선국사의 기가 서려있는 옴천사로 새롭게 태어나 “사람은 훌룡한 것 좋은 것만을 상대하는 일은 아니다. 훌룡하고 좋은 것이라면 나 아니라도 사랑해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오히려 지고 지순한 사랑이란 다른 것에 비해서 떨어지는 것, 문제가 있는 것,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일때 의미가 있다.”라는 도선국사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현대 사회의 각박한 세상에 사는 중생과 국태민안을 위해 정진하는 사찰이 옴천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