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Km 2024-09-13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정우면 정신로 832-20
정토사는 선운사의 말사로, 팔봉산 또는 정토칠봉이라고도 불리는 정토산 중턱에 있다. 1299년 담운선사가 창건했다고 구전되지만, 절의 연혁을 기록한 사적기나 기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확실한 것은 아니다. 정토사는 약사전·관음전·종각·칠성각·요사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조미륵입상과 삼층석탑, 정토사 기적비 등이 조성되어 있다. 약사전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내부에 주존 불인 석가 불좌상을 비롯하여 영산 후불탱·지장탱·신중탱 등이 있다. 관음전은 정면 5칸의 우진각 지붕으로 법당 겸 요사로 사용되는데 내부에 관음상을 비롯하여 소형 여래상 등이 모셔져 있다. 칠성각은 정면 3칸·측면 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불상은 봉안되지 않았으며 칠성탱·산신탱·독성탱 등의 불화만 조성되어 있다. 주변 관광지로 창동서원, 백운암석불입상, 말목정과 감나무, 전봉준선생고택, 말목장터유지비가 있다.
10.3Km 2024-01-18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내장산로 936
내장산국립공원 내장사에서 금선계곡을 따라 1.5km 정도 올라가다 보면 우측 산 중턱에 용굴이 나온다. 금선계곡 오른쪽에 위치한 용굴은 가파른 철재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이 당시 난을 피해 정읍의 유생들인 오희길과 손홍록은 전주의 사고(史庫)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의 영정을 내장산 용굴로 옮겨 3개월 동안 지켰다. 후에는 이곳보다 더욱 험준한 곳에 있던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겨 보관하였다고 전해진다. * 전주사고에 보관되었던 8백여 권의 조선왕조실록 * 조선왕조실록은 정읍사람 안의와 손홍록이 없었더라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불태워져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국가의 중요한 서적을 보관하던 서고인 사고는 경복궁내 춘추관,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 충청도 충주 4곳에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4곳의 사고가 모두 불타버렸지만, 전주사고에 보관되었던 8백여 권의 조선왕조실록은 불태워지기 전 내장산의 은봉암과 용굴에 피신시켜 지켜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왜군이 들이닥친다는 소문을 듣고는 자기 집안의 머슴들을 이끌고 전주까지 달려가 전주사고의 참봉인 유신, 오희길 등과 함께 임진왜란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목숨을 걸고 내장산 깊은 곳 은봉암과 용굴까지 피신시킨 것이라 한다. 은봉암은 내장산 금선폭포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현재 전하지 않으며 용굴(龍窟)은 전라북도 정읍시 내장동 내장산 금선계곡에 있는 동굴로 길이 8m, 높이 2~2.5m에 이른다.
10.3Km 2024-10-24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내장산로 1220-74
서래봉 중봉 330m고지에 있었으며 원래 내장사란 이름으로 일컬었는데 근세에 와서 영은암(현 내장사)을 내장사로 개칭하고 이곳은 백련암(白蓮菴)이라 이름하였고 나중에 벽련암(碧蓮菴)으로 고쳐쓰게 되었다. 그후 현 내장사와 구분하기 위해 김창한(金彰漢, 정읍군수 역임)이 "고내장(古內藏)"이란 서액을 걸고 이 일대를 고내장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옛날에는 주사(主寺)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백제 의자왕 20(660년) 환해선사(幻海禪師)의 창건으로 1925년 백학선사(白鶴禪師)가 본전이 극락보전과 요사를 중건하고 선당(호상소림)을 세웠는데 6·25병화로 1951년 소실되었다. 일찍이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백련암(白蓮菴)"을 벽련암(壁蓮菴)"으로 개칭할 것을 권하고 서액을 써 걸은 사실이 있는데 6·25사변때 소실되었다. 서편에는 연대 미상의 석종부도 1좌가 있으며 뒤편의 암벽 에는 이 고장 출신의 여류명필 몽련당(夢蓮堂) 김진민의 「석란정(石蘭亭)」이란 각자가 새겨져 있다. 벽련암 석축대를 쌓을때 전해져온 전설에 의하면 희묵대사가 서래봉 정상에서 돌을 던지면 수제자 희천(希天)이 이를 받아 쌓아 올렸다는 것이다. 이곳은 1986년 당국의 복원계획에 의하여 중건되었고 현재 복원이 진행중이다. 이 곳 고내장(古內藏)은 내장산 제일경(第一景)으로 일컫는 명소로 오봉 김제민이 춘경(春景)을 읊은 천불전(千佛殿)의 위치가 고내장으로 추측된다. 백련사가 언제 백련암으로 격하되었는지 알 수 없다.
10.4Km 2024-08-23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영원면 영원로 1049
백정기의사기념관은 항일 독립운동가 구파 백정기 의사의 조국 광복을 위한 희생과 고귀한 뜻을 새기고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한 사당과 기념관이다. 이곳은 총 부지면적 20,850㎡으로 백정기의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의열사, 구파 기념관, 청의당, 의열문, 숭의문, 백정기의사 동상 등이 자리하고 있다. 구파 백정기 의사는 1896년 부안군 동진면 출신으로 1907년 영원면으로 이사 와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20년 경성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하여 1930년 북만주로 가서 활동하다가 1933년 상하이 홍커우 육삼정거사를 준비하였으나 사전 발각되어 실패하고 검거되어 일본 장기형무소에서 복역 중 1934년 순국하셨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의사 중 한 분으로 1946년 유해가 송환되어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구파 백정기 의사 순국 추모제가 열린다.
10.4Km 2024-01-1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내장동
전라북도 정읍시 내장동 내장산 금선계곡에 있는 폭포이다. 금선골의 용굴에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암반으로 이루어진 기름바위를 지나면 좌편 산벽에 암굴동문인 신선문에 이르게 되고, 신선문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골짜기가 끝나는 곳에 이르니 바로 금선폭포이다. 금선계곡의 말단에 위치하고 신선봉에서 내리는 높이 18m의 폭포로써 주변에 신선문, 용굴, 기름바위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일대는 험지로서 내장산의 비경(秘境)을 이루고 있으며 4개의 폭포가 첫 폭포 위에 연달아 있지만 밑에서는 하나밖에 보이지 않고, 수원(水源)이 짧아 가물면 물이 거의 말라버리는 것이 흠이다. 승려들이 이곳에서 목욕재계하고 1,000일 기도를 드려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10.5Km 2024-07-17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내장산로 800
내장야영장은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국립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어 가을철엔 울긋불긋한 내장산의 아름다움을 가장 가까이 즐길 수 있는 캠핑장이다. 자동차 야영장 사이트는 45동, 하우스는 20동으로 총 65동이며, 바닥은 방부목 테두리 내 마사토 포설로 되어 있다. 각 사이트에는 소화기와 배전함이 있어 편리함과 함께 안전 관리도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 사이트마다 테이블도 하나씩 비치되어 있어 이용객들의 편의를 더했다. 국립공원공단에서 운영하는 만큼 여느 캠핑장에 비해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 가능하다. 단풍철이 되면 캠핑장 예약은 하늘의 별 따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착순으로 이용 가능하니 서둘러 예약해야 한다. 이곳은 시내와 접근성이 용이해 야영장에서 도보 1km가량 떨어진 곳에 터미널, 식당, 숙박시설이 있다. 캠핑장에서 내장사까지는 3km가량 단풍길이 이어지는데 참고로 11월 1주~2주가 가장 피크 시기다. 이 시기 형형색색의 단풍은 나무에 물감을 쏟아부은 것처럼 그림 같은 절경을 자아낸다.
10.6Km 2024-01-18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내장산로 1253
아름다운 내장산국립공원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내장사는 백제 무왕 37년(636년)에 영은 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한때는 50여 동의 대가람이 들어섰던 때도 있었지만 정유재란과 6.25 때 모두 소실되고 지금의 절은 대부분 그 후에 중건된 것이다. 금산사와 함께 전라북도의 대표적인 절이다. 내장산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가운데에 자리 잡아 주변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특히 가을철 단풍이 들 무렵의 절 주변의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백양사, 방장산, 장성호, 담양호 등이 주변에 있고 주요 문화재로는 내장사 이조 등종이 보존되어 있다.
내장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동종으로 고려 후기 동종에서 보이는 일반적 양식을 갖추고 있다. 내장사가 중건된 후 전라남도 보림사(寶林寺)에서 옮겨온 것이다. 일제 말기에는 놋쇠 공출을 피하여 원적암(圓寂庵)에 감추었고, 한국전쟁 중에는 정읍 시내 포교당에 피난시켜 보전을 꾀하였다. 높이 80㎝, 종신 길이 60㎝, 구경 50㎝의 소형이나 명문(銘文)이 확실한 조선 후기 범종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전북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모양은 마치 김칫독을 엎어놓은 것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배 부분[鐘腹]과 견대(肩帶), 구 연대(口緣帶)도 확연하며, 문양대에도 4개의 유곽(乳廓)을 배치하였다.
* 배부분에 비천상(飛天像) 대신 보살상을 양각 *
종정(鐘頂)에는 네 발로 천판(天板)을 딛고 용틀임하듯 구부린 용으로 용뉴를 만든 것이나 그 옆으로 음관을 낸 것도 격식 대로이다. 다만 배 부분에 비천상(飛天像) 대신 보살상을 양각한 것이 다를 뿐이다. 견대(肩帶)는 두 줄의 띠로 구분하여, 윗띠에는 당초문(唐草紋)을, 아랫띠에는 윗띠의 돌출 부분을 따라 여의두문(如意頭紋)을 배열하였다. 견대 밑에는 24개의 작은 원 문양을 돌리고, 그 안에 범자(梵字)를 양각하였다.
* 영조4년에 주조된 동종 *
유곽은 각각 당초문을 새긴 사각 띠로 둘러싸고, 그 안에 3단 3열의 종유(鐘乳)가 정연히 배열되어 있다. 각 종유 주위는 둥근 연화문(蓮花文)이 받치고 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2구의 보살 입상을 배치하고, 그 아래 둥근 모양의 꽃무늬 당좌(撞座)가 2개 있다. 당좌 사이에 ‘乾隆三十三年戊子十月施主趙漢寶全南長興步林寺鑄成(건륭 33년 무자 10월 시주조한보 전남장흥보림사주성) 云云’하는 종기(鍾記)가 있다. 조한보가 부친의 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하였다는 내용이다. 건륭 33년은 조선 영조 4년(1768)으로, 이 종이 주조된 해를 말해 준다.
10.7Km 2024-09-13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내장호반로 328
‘산 안에 숨겨진 것이 무궁무진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내장산[內藏山]이다. 가을이면 온통 선홍빛 단풍으로 지천을 물들이는 내장산은 찾는 이의 가슴에 진한 추억을 남기는 ‘호남의 금강’이다. 불타는 단풍 터널과 도덕폭포, 금선폭포가 이루어 내는 황홀경은 단풍 비경의 대명사로 손색이 없다. 해마다 단풍 천지를 이루는 가을뿐만 아니라 봄에는 철쭉과 벚꽃, 여름에는 짙고 무성한 녹음으로, 겨울에는 바위 절벽의 멋진 비경과 아름다운 설경, 그리고 사계절 내내 갖가지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만개하여 오가는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내장산국립공원은 ‘호남의 5대 명산’인 내장산을 비롯하여 남쪽으로 이어진 백암산, 그리고 내장사, 백양사 등 유서 깊은 사찰과 함께 전봉준 장군이 체포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거쳐 간 입암산성까지를 포괄하는데, ‘봄 백양, 가을 내장’이라는 말처럼 비경의 연속이다.
10.8Km 2024-09-03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내장산로 987-30
내장산에서 선인봉 입구까지의 계곡에는 굴거리나무 군락이 있고, 또 선인봉에서 샘터 사이에는 가슴 높이 둘레 20㎝, 높이 약 9m의 군락이, 내장사에서 해발 300m의 전망대 사이에도 굴거리나무-참단풍의 군집과 신갈나무-졸참나무가 한 곳에 떼를 지어서 모여 있다. 굴거리나무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지대와 제주도, 전라도의 내장산·백운산 등 따뜻한 지방에서 자란다. 한자어로는 교양목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새잎이 난 뒤에 지난해의 잎이 떨어져 나간다는, 즉 자리를 물려주고 떠난다는 뜻이다. 정원수로 좋으며 가로수로도 유명하다. 난대성 나무이면서도 전형적인 온대 낙엽활엽수림 지역인 이곳에서 집단 서식하는 희귀성을 인정받아 자생지 360,993㎡(109,200평)가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10.9Km 2024-06-03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 산 20
예로부터 전라남도를 방어하는데 중요한 곳으로 노령산맥에 이어져 전라북도 정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성이다. 입암산(해발 626m)의 계곡 능선을 따라 만든 포곡식 산성으로 약 3.2km 정도 남아 있다. 입암산성의 축성시기는 기록이 없으나 삼한시대의 성으로 추측되고 있다. 후백제시대 나주를 왕건에게 점령당한 견훤의 중요한 요새이기도 했던 이곳은 고려 고정 43년(1256) 몽골 6차 침입 때의 격전지였음이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 성의 밑부분은 백제의 양식이며 상부는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태종 9년(1409)에 고쳐 쌓고, 이후 성의 폭을 넓히고 낮은 곳을 높이 쌓았다. 남문과 북문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성벽은 수직에 가까우며 물을 막아 충분한 양의 물을 준비해 오랜 시간 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한, 조선 후기 방어시설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