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사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충장사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충장사

12.6 Km    29569     2024-04-29

광주광역시 북구 송강로 13

원효사로 올라가는 도로를 따라 배재에 이르면 왼편에 잘 가꾸어진 묘소와 함께 충장사의 우람한 건물이 바라다 보인다. 이 충장사는 무등산이 낳은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모신 사우로 1975년에 세워졌다. 경내에는 김덕령의 영정과 교지가 봉안되어 있는 사우 충장사,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과 해설비, 유물관, 충용문, 익호문 등이 세워져 있다. 유물관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김덕령 장군 의복과 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관곽, 친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당 뒤쪽 언덕에는 김덕령의 묘와 묘비가 있으며 가족묘도 조성되어 있다. 충장사로 향하는 길은 광주 사람들에게 드라이브 코스로 사랑받는 길이다. 봄이면 노란 개나리가 길섶을 수놓고, 여름이면 신록이 우거져 터널을 이루며, 가을이면 빨간 단풍이 숲을 물들이고, 겨울이면 나무마다 눈꽃이 피어 설원에 온 듯 장관을 이룬다.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광주 사람들이 즐겨 찾는 길이다. * 김덕령 장군에 대하여 김덕령 장군은 광주시 충효동에서 1567년 광산 김씨 가문 붕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글을 배워 장성하면서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송강 정철과 함께 수학하였다. 1592년(선조 25년)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과 함께 의병활동에 참가하였다. 이 때 형 덕홍은 의병장 조헌이 이끈 금산싸움에서 전사하였으며, 장군은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 현감 이귀등의 천거로 선조로부터 형조 좌랑의 벼슬을 받았다. 1593년 담양지방에서 의병 5,000여 명을 이끌고 출정하니 나라에서는 장군을 선전관으로 임명하고 익호장군의 호를 내렸다. 1594년 권율장군의 휘하에서 진해, 고성에서 왜군을 방어했으며, 장문포 싸움에서는 충무공 이순신과 수륙연합전으로 왜군을 크게 물리쳤다. 1595년에는 고성에 상륙하는 왜군을 기습 격퇴하여 큰공을 세우니, 선조로부터 충용장이란 군호를 받았다. 1596년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하던 중 모함으로 투옥돼 갖은 고문 끝에 그 해 9월 15일 29세의 나이로 결국 김덕령은 감옥에서 고문을 받다가 장독으로 옥사하였다. 나라를 위해서 수많은 공을 세우고도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을 더욱 떠받들어 그의 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작자 ·연대 미상의 전기소설 《김덕령전》이 있다. 1661년(헌종2년)에야 공의 억울함이 조정에 알려져 관직이 복직되고, 1668년 병조판서에 가증, 영조 때 의열사에 제향되었으며 1788년 정조는 장군께 충장공의 시호를 내렸으며, 장군이 태어난 마을 석저촌을 충효의 고을이라 하여 충효리로 바꾸도록 하였다.

구지가

구지가

12.6 Km    1     2023-05-15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지강로 650

전라남도 화순군에 위치한 구지가는 운치 있는 황토 외관이 주는 멋이 느껴지는 식당이다. 큼지막한 갈치가 무, 감자, 두부, 고구마순과 함께 주물 불판에 조려져 나오는 갈치조림 정식과 쌈밥 정식 두 가지 메뉴만을 취급한다. 갈치조림 정식은 갈치의 비린 맛이 전혀 없고, 진한 국물 속 재료들이 갈치와 함께 졸여지면서 국물이 진해지고 깊어진다. 느긋한 마음으로 약한 불에 졸여가며 먹다 보면 마지막 국물에 밥을 비벼 먹을 때까지도 그 깊은 맛이 지속된다. 국내산 나물과 김치 등 10여 가지의 맛깔스러운 밑반찬과 쌈밥정식도 맛볼 수 있다.

롯데하이마트 상무점

롯데하이마트 상무점

1.3 Km    0     2024-03-23

광주광역시 서구 상무대로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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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서원(빙월당)

월봉서원(빙월당)

12.6 Km    3725     2024-03-12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곡길 133
062-611-3636

월봉서원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기대승(1527∼1572)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선조 11년 김계휘를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기대승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인조 24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효종 5년에 ‘월봉’이라고 사액되었다. 원래 이곳은 기대승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박상, 박순, 김장생, 김집 등 조선의 명신들을 함께 배향하고 있는 ‘월봉서원’의 강당이었다. 월봉서원은 그가 죽은 뒤 그를 추모하기 위해 큰아들인 기효승이 선조 11년에 세운 것으로 정조가 ‘빙월당’이라 이름을 지어 내렸다. 빙월당은 광주광역시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장판각에는『고봉집(高峯集)』 목판 474판이 보관되어 있다.

빙월당

빙월당

12.6 Km    21544     2023-06-01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곡길 133

* 성리학자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을 배향하는 곳, 빙월당 *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을 배향하였으며, 백우산 기슭 광곡(너브실) 마을에 있다. 기대승의 장남 기효증이 1607년(선조 40)에 아버지를 추모하여 지었으며 1938년 기대승의 후손에의해 이전·개축되었다. 월봉서원은 당초 고봉을 추모하기 위해 고봉 사후 7년 만인 1578년(선조11)에 낙암(현 신룡동)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고 동천(현 산월동)으로 옮겨서 건립했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가 1941년 현위치에 빙월당을 새로 지었다. 이어 1978년부터 사당과 장판각, 내삼문, 외삼문의 건립에 착수, 1981년 모두 준공을 보았다. 빙월당의 당호는 정조가 고봉의 고결한 학덕을 상징하는「빙월설월(氷月雪月)」의 뜻으로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빙월당이 자리 잡은 곳은 백우산 기슭 광곡(너브실)마을의 원 종가터인데 높다란 대지 위에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주변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매우 풍치가 아름답고 경내도 조용하다.

* 빙월당의 건물 *

빙월당은 후손에 의해 원래의 건물이 이전되거나 개축되었고, 또한 소실된 건물을 복원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후손에 의해 복원된 여러 건물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사당](祠堂) - 정면3칸, 측면2칸반의 팔작집, 정면 반칸은 퇴로 개방되어 있다. 41.98m² (건평 12.7평)

[강당](氷月堂) -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양측 1칸씩은 모두 퇴간(退間)인데 전면과 우측 반칸에는 툇마루를 설치했다. 안쪽으로는 후면 반칸을 포함 좌측 2칸에 온돌방을 꾸미고, 우측 3칸에는 우물마루를 깐 대청을 꾸몄다. 84.29m²(건평 25.5평)

[장판각](藏板閣) - 빙월당 우측에 있는 원래부터 있던 장판각과 좌측에 있는 새로 만든 장판각 2동이 있다. 본래의 것은 정면, 측면 모두 1칸 규모의 맞배집이며, 새 장판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2동의 건평은 도합 26.44m²(8평)이다. 새 장판각에 고봉집(高峯集), 논사록(論思錄), 왕복서(往復書), 이기왕복서(理氣往復書)등의 목판(木板) 474매가 보존되어 있다.

[내삼문](內三門) -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 솟을삼문. 13.55m²(건평 4.1평)

[외삼문](外三門) - 내삼문과 같은 솟을삼문. 12.56m²(건평 3.8평) 원래 월봉서원은 1655(효종6)에 사액(賜額)되었고, 사우(祠宇)와 동제(東齊)- 명성제(明誠齊), 서제(西齊) - 존성제(存省齊), 강당(講堂) - 충신당(忠信堂)이 갖추어졌는데 월봉서원의 액호(額號)는 이산로, 나머지 편액은 송준길이 썼던 것인데, 현판들은 현재 장판각에 보존되고 있다.

*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 기대승에 대하여 *

기대승(1527~1572)은 조선중기 성리학의 대가로서 자는 명언, 호는 고봉이며, 시호는 문헌이다. 광주 소고룡리 송현동(현 광산구 신룡동)에서 성리학자인 기진의 2남으로 태어났다. 이퇴계와 김하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선학을 놀라게 하는 새 학설을 제시하여 존경을 받았다. 사단칠정을 주제로 한 왕복서한을 이퇴계와의 사이에 주고받은 이른바 사칠이기론은 너무도 유명하다. 1549년 사마시을 거쳐 1558년 문과에 급제, 156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았고, 종사관(從事官), 집의(執義), 전한(典翰),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했다. 1572년 대사간에 올랐으나 병으로 벼슬을 하직하고 귀행중 45세의 나이로 고부에서 별세했다. 종계변중의 진문을 써서 명(明)나라에 보낸 공로로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추록되고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졌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 소유자 - 행주 기씨 문중
* 수량 - 일원
* 시대 - 조선시대
* 규모 - 사당, 빙월당, 장판각(2동), 내삼문, 외삼문

롯데하이마트 상무롯데마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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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Km    0     2024-03-23

광주광역시 서구 시청로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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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집가마솥설렁탕

종가집가마솥설렁탕

1.3 Km    20926     2023-12-11

광주광역시 서구 시청로20번길 10
062-374-0015

광주에 처음으로 정통 서울식 설렁탕을 선보인 설렁탕 전문음식점으로 모든 음식은 100% 순수 사골로만 조리한다.

죽림사(나주)

12.8 Km    20176     2023-10-04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풍림죽림길 255

중봉산 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로 백양사의 말사이다. 사적에 의하면 죽림사는 백제 비유왕 24년(440) 경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통일신라 때 것으로 추정되는 사리 16과와 불두가 발견되어 통일신라 이전이나 같은 시대로 추정된다. 1983년 극락보전을 보수할 때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리 16과와 청동불두가 발견되어 죽림사는 적어도 통일신라시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창건 시의 규모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7전(殿), 3당(堂), 2실(室), 3요(寮), 6암(庵), 1사(寺)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극락보전과 영산전·삼성각 등의 전각과 염화실·청향각·회심당 등의 요사, 수각·부도(5기)·대형맷돌·석조여래좌상 등이 있다. 죽림사에는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 청향각에는 1998년 6월 29일 보물로 지정된 죽림사 세존괘불탱이 있으며, 죽림사 극락보전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영산전 앞뜰에는 전체 높이 141cm의 석조여래좌상이 놓여 있으며, 사찰 입구 축대 앞에 청계당대사 부도와 월하당대사 부도 등 18세기 중엽에 조성된 부도 5개가 일렬로 놓여 있다.

너릿재공원

12.8 Km    21799     2023-09-26

광주광역시 동구 남문로 48-8

광주광역시 동구와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을 연결시키는 너릿재터널 입구의 화순 쪽 도로변에 조성된 작은 공원이다. 1971년 터널이 개통 되기 전까지만 해도 너릿재는 큰 눈이 오면 한 달이 넘게 길이 끊기곤 했고, 그 이전에는 대낮에도 산적이 나오는 험한 고개였다. 또 갑오농민전쟁 때에는 농민군들이 무더기로 처형되고,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과 국군들이 대치했던 곳이었다. 『여지도서』(화순)에 "북쪽으로 광주와의 경계에 있는 판치(板峙)까지 가는 길이 9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지지』에 "판치는 북쪽 10리에 있으며, 광주와 경계이다"라고 수록되어있다. '판(板)'은 판판하고 넓게 켠 나뭇조각인 널빤지를 의미하는데, 치(峙)는 언덕이나 재(고개)를 를 뜻하는데 널재 또는 널의 재에서 너릿재가 한자로 표기되면서 판치가 된 것으로 보인다. 너릿재 터널을 오가는 이들의 휴식처인 너릿재 공원에는 1951년 4월 너릿재에서 싸우다 산화 한 무명용사들의 묘지와 1950년 10월 북한군의 습격으로 숨진 당시 화순경찰서 소속 경찰관 23위를 모신 순국경찰묘지가 있으며 충혼불망 비도 세워져 있다. 광주 쪽의 너릿재터널 입구에도 시비(詩碑)와 쉼터 등이 설치된 만남의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너릿재옛길

너릿재옛길

12.8 Km    1     2023-09-05

광주광역시 동구 남문로 48-8 공중화장실

너릿재 옛길은 광주 동구 선교동에서 화순읍을 잇는 약 4.3Km의 고갯길로, 예로부터 광주와 전남 동남부권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무등산에서 장불재로 이어져 남쪽 수레 바위산과 소룡봉 사이의 재로 현재 29번 국도가 통과하고 있다. 너릿재는 1971년 터널이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눈이 많이 오면 한 달 넘게 길이 끊기기도 했고, 옛적에는 낮에도 산적이 나오는 험한 고개였다고 한다. 또한 갑오 농민 개혁 때에는 농민군들이 무더기로 처형되었고, 6.25전쟁 때는 빨치산과 국군들이 대치했던 것이기도 하다. 『여지도서』(화순)에 ""북쪽으로 광주와의 경계에 있는 판치(板峙)까지 가는 길이 9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지지』에 ""판치는 북쪽 10리에 있으며, 광주와 경계이다.""고 수록되어있다. '판(板)'은 판판하고 넓게 켠 나뭇조각인 널빤지를 의미하는데, 널재 또는 널의 재에서 너릿재가 한자로 표기되면서 판치가 된 것으로 보인다. 1971년 너릿재터널 개통 후에 오랜 세월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걷기 좋은 명품 숲길”로 다시 탄생한 너릿재 옛길은 계절마다 색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특히, 봄이 되면 산등성이를 따라 놓인 고갯길을 따라, 연분홍빛 벚꽃길이 장관을 이룬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자연 그대로 피어난 벚꽃들을 보기위해 많은 시민들이 찾는 인기장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