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6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왕산로 439-13
산청군 생초면에 위치한 평천서원은 1694년(숙종 20)에 창건하였다. 창건된 후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서원에서는 배현경(裵玄慶), 배신침(裵愼甚), 배세겸(裵世謙) 등 세 사람을 배향하고 있다. 본 서원 일대가 1990년대에 대진간 고속도로 교착지로 편입하게 되어 있어 생지봉 임당선생묘소(生旨峰 林塘先生墓所) 산록으로 이건하고 평천서원으로 복원하였다. 평천서원기문에 의하면 본 서원은 1788년( 정조 12)에 열읍 사림의 공의로 산음현 서모음(山陰縣 西毛音)에 배신침과 배세겸 양 부자를 봉향하기 위하여 창건하였으며, 1819년(순조 19)에 배현경을 추향 하였다고 하였다.
2025-03-16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덕암로5길 5-2
태암서원은 담양 전씨 문원공 전조생과 그의 후손 전자수를 추모하기 위해 유림과 후손들이 세운 서원이다. 1789년(정조 13년)에 유림과 담양전씨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해체되었다가 다시 세웠다. 전조생은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학자로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던 분이다. 고려 찬성검의부사로 있을 때 충혜왕으로부터 왕자 2인을 부탁받고 정학에 힘썼으며 이어 공조전서를 지내기도 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였을 때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신하의 도리를 지키며 두문동에 들어간 72현 가운데 한 분이다. 또 함께 배향된 전자수는 문원공 조생의 손으로 일찍이 벼슬에 나가 광정대부첨의평사 겸 진현관대제학으로 지냈다. 경내의 건물로는 별묘와 강당 등이 있다. 별묘는 영정을 모신 곳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강당은 유생을 교육하고 유림들이 모임을 갖던 장소이다. 앞면 6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가운데 3칸에 마루를 두고 양 옆에는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매년 음력 2월 말 정일(丁日)과 10월 10일의 춘추 2회에 걸쳐 유림에 의한 향사가 봉행된다.
2025-03-16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청현로99번길 32-19
조선시대 단성현에 속하였던 산청 청곡서원은 1702년(숙종 28년)에 일신당 이천경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사림이 창건했으나, 1868년(고종 5년)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됐다. 이후 후손들이 1896년에 강당을, 1924년에 사당을 각각 중건했다. 이천경(1538~1610)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문인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의 봉양을 위해 관직을 사양했으며, 저서로 ‘일신당집(日新堂集)’이 있다. 청곡서원은 중심축에 따라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당이 위치하는 전학후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교육공간인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며, 활주를 많이 사용하는 경남 서부지방 건축의 지역성을 잘 보여준다. 제향 공간인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절충식 공포를 사용하였으며 치장과 화려함을 추구한 근대기 건축 기법이 나타난다. 서부 경남을 중심으로 활동한 지방 목수 기법이 반영된 특색 있는 문화유산으로 건축·학술적 가치가 높아 2024년 6월 27일에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2025-03-16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수동2길 74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있는 청계서원은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1921년에 옛 청계정사의 터에 세웠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그의 스승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사건에 연루되어 무오사화로 희생되었다. 글에 뛰어났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였다. 연산군 1년(1495)에는 ‘청계정사’를 세워 유생을 가르쳤고, 광무 10년(1905)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그 뒤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청계서원’이라 하였다. 구경재와 동재, 서재, 홍남문, 솟을삼문 등의 건물이 남아 있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25-03-19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청계1길 116-12
함안군 칠서면 청계 1길 116-12번지에 소재하는 청계서당은 1670년(현종 11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하나, 이후 1918년에 다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로 인해 서당의 강당구조 및 창호 등에서 근대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온돌방 앞의 띠살창과 청방간의 분합문은 전통건축에서 볼 수 없던 것으로 개화기 이후 외래 건축문화와 주의식의 변화가 반영되어 나타난 것으로 전통건축의 변화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소박한 건축물에서 근대성과 지역성을 잘 반영된 건물이다. (출처 : 함안군 문화관광)
2024-06-14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 (본성동)
청계서원은 1833년(순조 33)에 건립되었으며,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정신열 선생과 고려 말 물레를 개발하여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목화) 옷을 입게 한 정천익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이다. 본래 대평면 마동에 건립되었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된 것을 1961년에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였다. 1961년 후손들이 복원 사업을 시작하여 경덕사와 정교당을 건립하여 봉남서당이란 이름으로 그 맥을 이어오다 1993년 숭은사와 진사청을 재건하고 청계서원으로 복원하였으며, 서쪽 경덕사에는 정신열 선생의 위패를, 동쪽 숭은사에는 정천익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15일 사당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
2025-03-16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2길 23-61
청계서원은 우옹 이희안(1504∼1559)과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전치원, 이대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희안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김안국의 문인이다. 몇 차례 관직에 나갔으나 사직하고, 조식과 사귀며 학문을 닦았다. 명종 19년(1564)에 처음 지었다. 이후 고종 6년(1869)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그 뒤에 복원하였다. 이 서원은 왼편과 오른편에 동재·서재가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서당과 대문간채만 남아 있다. 서당은 앞면 5칸, 옆면 1칸 규모이며, 앞뒤로 퇴칸이 있다. 왼쪽부터 방과 마루 2칸, 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왼쪽 방 뒤에만 퇴칸이 있다.
2025-03-16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삼계로 63
첨두 서원은 임진왜란 때 왜적과 맞서 공을 세워 선무 원종 이등 공신에 책록된 노경종을 추모하여 교하 노씨 후손들이 건립한 서원이다. 1981년 향교 유림에 의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서원으로 승격된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 1731년에 서원으로 건립되었다가 고종 시기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쇄되었으며, 1947년 복원 이후 1950년에 소실되었다가 1955년에 재건되었다고 한 기록이 있는가 하면, 첨두재로 건립되었다가 1981년 유림의 공의를 얻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첨두서원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목조 건물로 팔작지붕의 구조이다. 첨두서원의 강당 서쪽에 사우가 배치된 이른바 서묘동학의 구조이다.
2024-06-18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절한 의병장 김천일 등을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된 사당이며,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에 있다. 1593년(선조 26) 서울에서 물러나 부산 등지에 집결되어 있던 왜군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하여, 10여만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김천일 등은 끝까지 성을 사수하다가 순절하였다. 이에 임진왜란이 끝난 뒤 관민이 협력하여, 그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사우를 세웠으며, 1607년 사액 되었고, 1712년(숙종 38) 병사 최진한에 의하여 중수되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대상에서 제외되어 존속되었다. 창렬사의 정사에는 충무공 진주목사 김시민을 필두로 하여, 문열공 창의사 김천일, 무민공 충청도병마절도사 황진, 충의공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의공 장윤, 효열공 고종후, 증이조판서 유복립 등 모두 7분을 열향하고 있고, 창렬사에는 모두 39명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2024-07-31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활성로 313-1
단장면 미촌리에 있는 칠탄서원은 임진왜란 때 밀양 석동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충위를 덜친 선조 때 울산판관과 영천군수를 지낸 오한 손기양을 봉안하던 사당이었다. 헌종 10년(1844년) 고을 사림들의 주장으로 오한이 만년을 보내던 별업 경내에다 청절사를 세웠다가 그 후 칠탄서원으로 편액 하였는데 이때 봉안문과 상향축문은 정재 유치명이 지었다. 고종 5년(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고, 후손들에 의하여 서원을 정으로 편액 하였으며, 1914년에 청절사가 있던 자리에 『칠탄서원유허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