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폴 신세계 대구점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빈폴 신세계 대구점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빈폴 신세계 대구점

빈폴 신세계 대구점

7.1Km    2024-03-23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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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럭시라이프스타일 신세계 대구점

갤럭시라이프스타일 신세계 대구점

7.1Km    2024-03-23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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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테가베네타 신세계 대구점

보테가베네타 신세계 대구점

7.1Km    2024-03-23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 149 5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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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신세계 대구점

프레드 신세계 대구점

7.1Km    2024-03-23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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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 신세계 대구점

불가리 신세계 대구점

7.1Km    2024-03-23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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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올 신세계 대구점

디올 신세계 대구점

7.1Km    2024-03-23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 149 5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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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비통 신세계대구

루이비통 신세계대구

7.1Km    2024-03-23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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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영남선비문화수련원(구암서원)

(사)영남선비문화수련원(구암서원)

7.1Km    2024-11-26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

구암서원은 1665년 구계 서침의 덕을 기리기 위해 대구부 유림들이 숭현사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1717년 동산동으로 이건하였고, 이듬해인 1718년에 서거정을 배향했다. 이후 서해, 서성, 서사원 등 대구 서씨 및 달성 서씨의 우뚝한 인물들을 추가로 배향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4년 유림이 다시 지었다. 1943년에 사당인 숭현사와 강당을 중수하였다. 1995년도에는 대구 북구의 연암공원으로 옮겼다. 서원의 구조는 조선시대 서원의 전형을 갖췄다. 서원의 가장 중요한 장소인 사당 숭현사가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그 앞에 강학 공간인 초현당이 있다. 초현당 마당 좌우에 학도들의 기숙사인 경례재(동재)와 누학재(서재)가 마주 보고 있다. 동재와 서재 아래에는 문루인 연비루와 관리동인 백인당이 있다. 연암산 중턱에 정남향으로 자리 잡아 대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관례와 계례, 다례, 밥상머리 예절, 국악, 활쏘기, 서예 등 다양한 문화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화장사(대구)

화장사(대구)

7.1Km    2025-03-19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비슬로522길 41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에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이다. 1925년 무렵 보원거사 김영옥의 발원으로 창건되었고 그가 입적한 뒤 사리 7 과가 나와 부도를 세우고, 1980년대에 지우스님이 주석하면서 중건하였다. 가람은 극락보전을 비롯해서 원통전, 칠성각, 일주문, 요사채 등이 있다. 극락보전에는 아미타여래가 극락에서 설법하고 있는 장면인 극락 회상도가 뒷벽에 탱화로 걸려 있고, 수미단은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주전각인 극락보전에 신라시대 옥불로 추정되는 작은 크기의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는데 건물에 비해 불상이 작은 이유는 원래의 본전이었던 용화전에 안치하였던 불상을 중창하면서 옮겨 왔기 때문이다. 대구광역시 기념물 천내리지석묘군에 포함된 고인돌 3기가 화장사 경내에, 화장사 담에 1기가 분포하고 있어 선사시대 유적을 만나볼 수 있는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청호서원

청호서원

7.1Km    2025-03-18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

이 서원은 조선조 대학자였던 모당(募堂) 손처눌(孫處訥)(1553~1634), 사월당 류시번(柳時藩), 양계(暘溪) 정호인(鄭好仁), 모당의 6대 조인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 네 분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모당 손처눌의 자는 기도(幾道)이며, 한강(寒岡) 정구문하(鄭逑門下)에서 사사(師事)하여 학행과 효우로 스승에게 인정받았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난리(亂離) 중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였으며, 이를 옳게 못 모신 것을 한탄하면서 임진왜란이 평정되자 종신여모(終身廬慕)한다는 뜻에서 자기 거처를 영모당(永慕堂)이라 하였다. 난(難) 후 그는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영모당은 언제나 문전성시(門前盛市)를 이루었고 '영모당통강제자록(永慕堂通講諸子錄)'에는 제자 202명의 명단이 적혀 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마을 앞에 청호지(靑湖池)를 만들어 영농에도 힘썼으며, 조정에서의 논공행상도 사양하였으며 다만 대구향교의 최고 책임자인 도유사(都有司)를 12년간 맡았다. 손조서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대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한림학사로서 필재(畢齋)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단종 때 봉산군수(鳳山郡守)로 있다가 단종의 참사 소식을 듣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 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밀양)으로 내려가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다. 청호서원 역시 1864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1947년경 강당만 세웠다가 1968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69년 강당과 위패를 모신 상인사(尙仁祠)를 중건한 것이다. 서원 입구에 모당선생 유허비(遺墟碑)도 세웠다. (출처 : 행복수성 문화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