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Km 2025-07-23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잠정햇살길 22
오로시예술공방은 도예가이자 모자이크 작가인 김종윤 대표와, 화순을 사랑하는 아로마 공예 작가, 요가 안내자가 함께 운영하는 열린 예술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흙을 빚으며 나에게 집중하는 도예 체험, 감각을 일깨우는 모자이크 공예,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아로마 공예와 야외 요가 프로그램 등을 경험할 수 있다. 단순한 체험을 넘어 지역 작가들과 교류하고 창작하며,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지향하고 있다.
16.3Km 2025-03-16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나주호로 558-314
1688-5400
나주호의 수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중흥골드스파&리조트는 나주호의 수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풍성한 놀 거리와 볼거리, 먹을거리를 두루 갖추고 있다. 동양 유일의 토네이도, 국내 최대 규모의 워터롤러코스터를 비롯한 각종 테마물놀이시설과 콘도, 펜션, 수상레포츠, 클럽을 갖추고 있다. 중흥골드스파&리조트에는 워터락을 시작으로 콘도와 펜션, 골프장이 어우러져 있는 종합 레저 타운이다. 또한 수상스키, 웨이크보드, 플라이피쉬, 땅콩보트, 바나나보트 등 다양한 수상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중흥골드스파&리조트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16.4Km 2024-10-31
전라남도 나주시 미천서원길 14-11
미천서원은 영산포에서 다시면으로 가는 길목인 전라남도 나주시 안창동의 철로변에 자리 잡고 있다. 서원의 강당 뒤편에는 미천 서원의 유래가 된 ‘미천'이라는 샘이 있다. 허목 선생이 어렸을 때 마을 사람들이 우물이 없어서 팔 생각을 못하자 이에 '내가 일러준 곳을 파보면 물이 나올 것이다'고 이야기하였다. 과연 그 곳에서는 물이 솟아나와 더 이상 고생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샘의 이름을 미천(眉泉)이라 부르고 이에 서원 이름의 연원이 된것이라고 한다. 이 서원은 17세기 조선시대 명현인 문정공 미수 허목의 도학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16년(1690)에 나주 금강 미천상에 사우로 건립되었다가 1693년 미천서원이라고 사액되었다. 이후 정조 23년(1799)에는 13대 미천서원 원장을 지낸 번암 채제공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채제공은 허목보다 훨씬 후대 인물이지만 허목의 학문을 따르고 미천서원에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추배하게 된 것이다. 1711년 홍명한이 중수하고 1715년에는 강당과 재실을 중수하였다. 그 후 철폐되었다가 영조 47년(1771) 이전에 사우가 중건된 후 고종 5년(1868) 서원 철폐령으로 2차 철폐을 당하였다. 서원이 철폐되자 영당과 장판각은 허목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 나주시 삼영동 선산 아래의 영당마을로 옮겨졌다. 1893년에 다시 미천서원의 옛 터인 지금의 자리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영당이 복설되어 현재의 자리로 영정을 이안하였으며 정면 6칸, 측면 3칸의 강당도 함께 중건되었다. 1930년 조기중이 강당 일부를 중수하였고 1937년 허영규가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이곳에서 차량 이동 4분, 약 2.8km거리에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와 나주철도공원이 있다.
16.5Km 2025-03-19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충의로 409
충의사는 임진왜란 당시 호남의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삼장사의 일원으로 순국한 최경회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사우이다. 충의사 내에 최경회의 부실 논개부인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한 영정각(의암 영각)이 함께 건립되어 있다. 최경회의 자는 선우, 호는 삼계, 당호는 일휴당이며 본관은 해주로서 화순에서 태어났다. 명종 22년(1567)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을 시작으로 사헌부와 형조 외에도 호남의 여러 지방의 관리로 근무하였다. 1591년 어머니 상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에서 시묘하고 있을 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청을 설치하고 수천의 의병을 일으켜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상복 차림으로 북상하여 무주 우지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선조 26년(1593) 6월 왜군이 다시 진주성을 공격하였을 때 창의사 김천일 등과 함께 진주성을 지켰으나 9일 만에 함락되고 남강에 투신, 생을 마감하였다. 시호는 충의이다. 충의사 일휴당 기념관은 충의공 최경회의 유품을 보관하는 곳으로 왜적으로부터 노획한 언월도(복제품)를 비롯하여 각종 교지와 기병장면도, 서사장면도 등 많은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16.5Km 2025-07-31
광주광역시 북구 풍암제길 14
무등산 북쪽 충효동에 자리잡은 가마터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까지 상감청자·분청사기·백자를 굽던 곳이다. 가마의 구조는 사람이 드나드는 출입시설·도자기를 집어넣는 번조실·굴뚝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둥근 무덤 형태가 연결된 모양으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과 출토유물의 연도를 통해 1430년을 전후해 만들어지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후 약 70∼80년간 자기 제작이 지속되다가 16세기 초에 중단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초기에는 분청사기만 만들다가 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같이 제작했으나, 분청사기의 무늬가 조잡해지면서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반면 백자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질이 좋아지고 생산량도 늘어 분청사기가마에서 백자가마로 성격이 바뀌었다. 백자는 크기가 작은 것이 주를 이루는 데 비해 분청사기는 크고 작은 것 모두 있고, 종류도 접시·종지·잔·병·항아리·벼루·제기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분청사기에 주로 사용된 무늬는 국화·나비·물고기·게·구름무늬 등이며 여러 무늬를 조합하여 그리기도 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운영되었던 곳으로, 청자부터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로 넘어가는 과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출처: 광주광역시 북구문화관광홈페이지)
16.5Km 2025-04-30
광주광역시 북구 풍암제길 14
무등산은 중생대 화성활동에 의해 형성됨에 따라 이 충효동 도요지 인근은 마그마가 굳어 만들어진 암석이 풍화된 토양(풍화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 가마터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의 도자기가 생산되었던 곳으로, 함께 발견된 3m가량의 도자기 파편층이 분청사기부터 백자까지 6단계의 변화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으며, 또한 이 지역에서 출토된 도자기를 지질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주변의 화강암 풍화토를 이용했음이 밝혀졌다. 이처럼 무등산 분청사기의 제작과 발달과정에는 무등산의 지질학적 특성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어 이곳을 무등산권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명소로 지정하였다.
16.5Km 2025-03-26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외딴 민가 옆에 우뚝 솟아있는 석탑으로, 현재는 절이 있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나, 그 옆에 석불입상이 1구 있어 상당한 규모의 절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탑은 2층 기단(基壇) 위로 5층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의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탑신부의 몸돌은 2층에서 갑자기 높이가 낮아져 5층까지 알맞게 줄어들었으며,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3층은 4단씩이다가, 4∼5층은 3단으로 줄었다. 꼭대기에는 돌의 재질이 다른 장식들이 놓여 있는데, 나중에 보충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형식에 치우친 모습이어서, 고려 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층 기단이 손상되고, 일부가 없어져 심하게 갈라진 위층 기단은 거의 무너질 정도였으나, 1981년 해체, 복원하였다. 탑 해체 시 발견되었던 유물들은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16.5Km 2025-03-19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학선리
개선사지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등으로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는데, 최근에 바닥을 파고 흩어진 부분을 정리하여 다시 세웠다. 높이 3.5m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 모양이 새겨졌고, 사잇기둥은 장고모양이며,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은 8각이며 창이 8면에 뚫렸다. 지붕돌은 아랫면에 낮고 널찍한 괴임이 있고, 8각의 끝부분에는 꽃모양을 둥글게 조각하였다. 석등의 창 사이 공간에는 통일신라 진성여왕 5년(891)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시대 석등 가운데 글씨를 새긴 유일한 예로, 비슷한 시대의 다른 작품의 연대와 특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표준이 되는 작품이다.
16.6Km 2025-03-20
광주광역시 광산구 명곡길 170-30
영사재는 광주 광산구에 있는 조선 후기 나주오씨 재실이다. 대동사와 함께 명곡부락 뒤쪽 산기슭에 있으며 조선 중기 학자이자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에 참여한 생노당 오효석(1620~1697)이 은거하며 후진을 길렀던 곳으로, 사후에 오효석의 재실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오효석은 광해군 때 본량에서 출생하여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양란에 참여하였으며, 효종의 사망으로 북벌 계획이 좌절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쓰다 68세로 사망하였다. 우암 송시열은 오효석을 대명처사라 불렀다고 한다. 오효석은 ‘생로당유고’를 남겼다. 영사재가 있는 곳은 골짜기가 길어 장탄이라고도 하는데, 워낙 골짜기가 깊어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의병들이 자주 머물며 무기를 제작하였다고 전한다. 특히 전해산 의병부대는 영사재에 주둔하며 무기를 수선하거나 화약과 탄환을 만들었다. 영사재는 한말 의병장 오성술 의병부대의 주둔지로도 자주 활용되었다. 오성술은 집안 사당인 영사재가 대명동천의 가장 깊숙하고 으슥한 곳에 자리한 점을 전술적으로 잘 활용하였던 것이다.
16.7Km 2025-07-31
광주광역시 북구 송강로 236-3 (금곡동)
광주 무등산수박마을은 광주 북구 석곡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곡마을과 충효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산세가 유순하고 가파르지 않아 푸근한 느낌을 갖게 하는 무등산 산자락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곳이 바로 마을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생화나 자연림 등을 만날 수 있다. 또한 마을 입구엔 400년 이상 된 왕버드나무가 세 그루 서있다. 왕버드나무는 희귀한 모양새를 지닌 거목으로 그 형태가 교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마을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말해주고 있다. *무등산 수박 광주를 대표하는 무등산 수박은 재배조건이 까다로워 강한 광선, 높은 온도, 긴 일조시간 등이 받쳐주지 않으면 길러내기 어렵다. 광주의 북구 일대는 이러한 절대적인 재배조건을 갖춘 곳이다. 이런 천혜의 조건 속에서 자란 무등산 수박은 특수한 향기와 맛이 별미로 특히 청록빛깔에 줄무늬가 없고 씨는 머리 부분의 눈만 검어 다른 수박과는 구별된다. 옛날 임금에게 진상되던 수박으로 일명 『푸랭이 수박』이라고도 불린다.